[사설] 질병본부 '중국 감염원 차단' 요청을 청와대가 묵살한 것

조선일보
입력 2020.02.26 03:26

우한 코로나 감염증이 본격적으로 번지기 이전에 질병관리본부(질본)가 '중국 전역에 대한 입국 제한' 요청을 했지만 외교부·복지부·행정안전부 등 관련 부처 회의에서 거부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관련 부처라고 하지만 이들도 권한이 없었고 실제로는 청와대가 결정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감염 원천을 차단하는 기본 상식을 뒤집는 것은 중대한 결정이자 도박이다. 청와대 아니면 할 수 없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대변인 격인 복지부 차관은 25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 질문에 "질본 판단을 근거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서 정부의 최종적 방침이 결정된다"고 질본의 '중국 차단' 요청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질본 측도 최근 "(방역 원칙이 아닌) 다른 부분들을 고려해 정부 차원에서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고 했다. 질본 요청이 묵살됐다는 얘기다.

질병관리본부는 국내 최고 방역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다. 감염병이 확산하는 위기 상황에서 질본 의견이 방역 정책에 최우선적으로 반영돼야 하는 건 기본이다. 방역 선진국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 미국은 방역 실무 책임자가 결정하면 대통령도 함부로 그 의사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한다. 질본이 '중국 전역 입국 제한'을 요청한 것은 상황이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도 그간 정부에 7차례 같은 권고를 했다. 구멍 뚫린 천장에서 비가 새는데 방바닥 물만 훔치는 식의 대응을 더는 두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방역 전문가, 의사 단체 의견을 번번이 묵살했다. 전문가 의견을 듣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 말을 듣나.

정부가 중국 감염원 유입을 왜 방치했는지 그 이유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19일 "방역 입장에선 고위험군이 덜 들어오는 (중국 방문객) 입국 금지가 당연히 좋다"고 했다. 방역 책임자로서 청와대에 다시 한 번 방역 필요성을 호소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일 정 본부장에게 전화해 "만약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빈말이었다. 같은 날 문 대통령은 일부러 시진핑 주석에게 전화해 "중국의 어려움은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했고 "두 정상은 시 주석의 금년 상반기 방한을 변함없이 추진하기로 했다"고 공개했다. 시진핑 방한이 중요하니 방역 당국에 입 닫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진핑 방한과 같은 정치적 고려 때문에 중국 입국 제한을 하지 않으면서 국민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이유를 대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관광객보다 중국 다녀온 우리 국민이 더 많이 감염시킨다"고 우리 국민 탓을 했다. 정세균 총리는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하면 상호주의가 작동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국민 안전을 지키는 데 상호주의가 왜 필요한가. 중국을 상대로 입국을 금지하고 국경 폐쇄까지 한 미국과 유럽, 러시아, 북한 등은 모두 중국의 보복 대상이라는 건가. 급기야 정은경 본부장까지 무슨 압력을 받았는지 이날 "이제는 해외 유입 차단보다 국내 감염에 더 집중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을 바꿨다. 국정 농단도 이런 국정 농단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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