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올해 특별한 성탄절을 보냈다. 지난 25일 리커창 중국 총리의 안내로 세계문화유산인 쓰촨(四川)성의 수리관개시설 두장옌(都江堰)을 둘러봤다. 두 총리는 문화 시찰을 전후로 회담, 오찬을 함께하며 4시간가량 대화를 주고받았다. "두장옌 안내는 나의 오모테나시(진심으로 대접한다는 일본어)"라는 리커창의 말에 아베는 "시찰에 동행하고 점심에도 초대해줘 따뜻함이 느껴진다"고 화답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참석차 아베와 같은 날 방중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귀국했지만, 아베는 하루 더 머물며 기억에 남는 성탄 선물을 받은 것이다.

두 총리의 지방 동행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리커창이 작년 5월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방일했을 때는 아베가 안내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은 홋카이도의 도요타 자동차 공장을 함께 둘러보며 관계를 두텁게 했다. 그때도 문 대통령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방일 10시간 만에 돌아가 버린 후였다.

두 총리가 2년 연속 양국의 지방을 함께 다닐 정도로 밀착하는 상황은 최근 동북아 정세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이다. 2012년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로 단교 직전까지 갔던 양국이 이젠 '중·일 신(新)시대'를 거론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방중한 아베에게 내년 4월 국빈(國賓) 방일을 사실상 약속했다. 광우병 문제로 18년간 유지해온 일본산 쇠고기 수입 금지도 해제했다. 올해 일본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은 지난해보다 10% 이상 증가세다.

세계 GDP 2·3위 국가의 밀착은 오월동주(吳越同舟)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미 대통령에 대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나왔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끔찍했던 난징(南京) 학살을 섣불리 국민감정화하지 않는다. 칼집에 넣어 둔 채 여간해서는 꺼내지 않는다. 아베가 구상한 인도·태평양 전략과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베는 일대일로가 시진핑의 역점 사업이라고 판단, 협력을 약속했다.

두 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판도를 짜기 위해 '거대한 게임(great game)'에 본격 착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드 사태 이후 한·중 관계는 한·일 관계보다 못하면 못하지 더 좋은 사이는 아니다.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논란은 한·미 동맹을 더 삐걱거리게 만들었다. '한·미 동맹 흔들, 한·일 관계 최악, 한·중 관계 심각' 상황에서 벌어지는 중·일 밀착은 앞으로 우리에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지난달 사망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자서전에 작은 힌트가 담겨 있다. 통상산업성 대신이던 나카소네가 중·일 수교 다음 해인 1973년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만났다. 화해 분위기에 힘입어 3일간 8시간에 걸쳐 온갖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 남북한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나카소네가 당시 분단돼 있던 동서독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반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저우언라이는 "남북한 쌍방이 각자의 체제를 가진 채로 연합 체제를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통일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보였다. 저우언라이는 "일본도 북한과 교류를 좀 더 증대시키기 바란다"고도 했다.

사이가 좋아진 중·일 양국의 두 지도자가 미국이 외면하는 사이에 남북한의 처리 방향을 본격 논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큰 게임을 할 줄 모르는 한국을 왕따시키는 것이 낫다"고 중·일이 합의해 버리면 한국의 안보, 경제는 어떻게 될까. 만개(滿開)하는 중·일 신시대에 두 나라에 대한 게임 플랜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새해를 맞는다는 사실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