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소셜미디어인 '협객도'는 17일 중국 첫 국산 항공모함 산둥함의 취역식을 소개하면서 "131년 전 이날인 1888년 12월 17일 북양수사(北洋水師·북양해군)가 창설됐다"며 "이날을 택해 산둥함이 취역하게 된 것은 역사적 의미가 중요하다"고 했다. 청나라 말기 창설된 북양해군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에 궤멸된 함대다. 중국 관영 언론이 강군몽(强軍夢)의 상징인 국산 항모를 굴욕의 상징 청나라 말기 함대 창설일에 취역시킨 것이다.

북양해군이라는 말은 1881년 청나라 정치인 이홍장이 정여창에게 황해(서해) 방어 책임을 맡기면서 처음 등장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군 300명은 북양해군 군함 등을 타고 조선에 와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청나라는 북양해군 군함 3대를 인천항에 순환 배치하며 전진기지로 삼았다.

북양해군이 정식 창설된 것은 1888년 12월 17일이다. 본부는 인천에서 서쪽으로 380㎞ 떨어진 산둥성 웨이하이 류공다오(劉公島)다. 군함 25대, 지원 선박 50대, 병사 4000여명을 갖췄다. 주력함인 정원함, 진원함은 독일제 철갑선으로 305㎜ 대포 4문 등을 갖춘 아시아 최강의 군함이었고 함장인 유보섬, 임태증은 영국 유학파 출신이었다. 1891년에는 정원·진원함이 일본 도쿄 앞바다까지 진출해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북양함대는 1894년 경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풍도해전, 평안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황해해전에서 일본 해군에 연패했다. 진원함은 1894년 웨이하이 앞바다에서 암초에 좌초했고 정원함은 1895년 웨이하이 앞바다에서 일본 어뢰정의 공격을 받아 운항이 불가능해지자 함장이 배에 폭약을 설치, 침몰시켰다.

조세현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청·일 전쟁 당시 영국은 일본이 훈련에서는 앞서지만 청·일 양국의 해군력은 비슷하다고 평가했다"고 했다. 장하이펑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은 2014년 중국 공산당 잡지 '추스'에 기고한 글에서 "황해해전에서의 작은 패배 이후에는 교전을 피하고 배를 지키는 전략으로 일본에 제해권을 내줬다"고 했다. 군함 등 '하드웨어 전력'보다는 이홍장의 수세적 전략이 패배 이유라는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근대화 운동으로서 양무운동과 북양해군에 대해 재평가해왔다. 다만 최고 지도부가 직접 북양해군을 언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패배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북양해군이 지키던 웨이하이가 함락되자 청나라는 1895년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대만, 펑후섬 등을 내줬다. 중국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2007년 '북양해군 참패의 경고'라는 기사에서 "북양해군 병사들은 속사포에 고기와 밥을 보관하면서 들키지 않으려 캔버스천으로 포구(砲口)를 막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중국이 해양 강국을 내세우면서 북양해군을 언급하는 일이 잦아졌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6월 웨이하이를 방문해 북양해군 기지와 포대 유적을 시찰하고 "항상 여기 와서 교육을 받고 싶었다"며 "한번 군사 분야에서 뒤처지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지난 9월 해저 탐사를 통해 침몰한 정원호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조세현 교수는 "정화 원정의 기함인 보선(寶船)이 고대 해양을 주도했던 중국의 영광을 상징한다면 북양해군은 근대 해군력의 상징"이라며 "산둥함은 신(新)북양해군을 건설해 현대 해양 강국이 되려는 중국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해군력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11월 발표된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2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핵추진 잠수함, 50척의 디젤 잠수함 등 총 330척이 넘는 군함·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다. 항공모함·해군 공군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에 뒤처지지만 구축함·상륙함 등을 포함한 전체 함선·잠수함 수에서는 미국(290척)을 앞섰다. 지난 5월 나온 미국해군전쟁대학 보고서는 "최근 10년간 중국 해군이 건조한 전함 수는 미 해군의 4배"라며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대 해군력을 갖췄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