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사드 문제 일방 발표, 정부 뒤늦게 화들짝

조선일보
입력 2019.12.06 03:02 | 수정 2019.12.06 10:42

"사드 적절히 처리해달라 했다" 외교장관 회담 내용 일방 발표
우리 외교부는 전혀 언급 않다가 中이 발표하자 "의견 교환 있었다"
왕이, 文대통령 앞에서도 美비판… 文, 내년 상반기 시진핑 방한 초청

5년 만에 방한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경북 성주에 임시 배치된 주한 미군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와 관련, 우리 정부에 "적절히 처리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사드 임시 배치를 문제 삼아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 등 각종 보복 조치를 취해온 중국이 이제는 사드의 '완전 철수'를 압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외교부와 청와대는 왕 부장의 사드 압박 사실을 쉬쉬하다가 이날 오후 중국 외교부가 해당 사실을 공개하며 논란이 일자 뒤늦게 시인했다. 정부가 '중국의 사드 압박'을 은폐하고 한·중 경제협력 등 홍보에 유리한 점만 부각했다는 지적이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양국은 공동 인식에 따라 '사드' 등 중·한 관계의 건강한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를 계속 적절히 처리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정당한 관심사를 존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왕 부장의 방한 성과를 설명하면서 '사드' 문제를 콕 집은 것이다.

왕이(오른쪽 셋째)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5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오찬 행사에서 건배 제의를 한 뒤 와인을 마시고 있다.
왕이(오른쪽 셋째)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5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오찬 행사에서 건배 제의를 한 뒤 와인을 마시고 있다. /김지호 기자

하지만 이에 앞서 열린 우리 외교부 브리핑에서 김인철 대변인은 사드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외교부는 전날 개최된 강경화 장관과 왕 부장의 회담 결과를 설명한 장문의 보도자료에서 사드 얘기는 쏙 뺐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도 '왕 부장이 (사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했느냐'는 질문에 "상호 관심사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교환했다. 더 이상 추가로 구체적으로 말할 사안은 없다"고만 했다. 이날 청와대도 문 대통령의 왕 부장 접견 결과에 대한 브리핑에서 사드 언급은 하지 않은 채 문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내년 상반기 방한을 기대한다는 내용 등만 거론했다.

외교부는 중국 외교부가 이날 오후 사드 관련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외교부는 언론의 질문이 쏟아지자 "사드와 관련해서도 종전 입장에 따른 원론적 수준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전직 외교부 차관은 "일부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건 전형적 '가짜 뉴스' 생성법"이라며 "중국 외교부가 발표하지 않았다면, 왕 부장의 사드 압박 사실 자체가 묻힐 뻔했다"고 했다. 일각에선 양 정부가 회담 결과 발표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文대통령 만나 미국 비판한 왕이 -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국빈 방문이 내년 상반기 조기에 이루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왕 부장은 “국제 정세는 일방주의와 강권 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됐다.
文대통령 만나 미국 비판한 왕이 -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악수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국빈 방문이 내년 상반기 조기에 이루어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왕 부장은 “국제 정세는 일방주의와 강권 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미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됐다. /연합뉴스

한편 왕 부장은 이날 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현재 국제 정세는 일방주의와 강권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와 대중(對中) 압박 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됐다. 왕 부장은 이어 "중·한(中韓) 양국은 이웃"이라며 "제때 대화·협력을 강화해 다자주의·자유무역을 수호하고 기본적 국제 규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의 관세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란 분석이다. 그는 전날 강경화 외교장관과 회담에서도 '패권주의'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등 작심한 듯 미국을 비판했다.

왕 부장은 이날 문 대통령 예방에 앞서 서울 한 호텔에서 주최한 오찬 연설에서 "모든 사람이 중국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라며 "중국의 발전을 억제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미국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왕 부장은 연설 뒤 취재진이 미 패권주의에 대한 생각을 묻자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위터에서 매일 관찰할 수 있다. 그게 매일 공론화되고 있다. 그것을 보면 된다"고 했다. 사드 배치와 관련한 한·중 갈등에 대해선 "사드는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서 만든 것으로, 미국이 만든 문제"라며 "미국이 이를 한국에 배치해 한·중 관계에 영향을 줬다"고 했다.


왕 부장은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중요한 전략적 소통을 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세 가지 희망 사항을 밝혔다.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상호 신뢰 관계 구축 더 수준 높은 (양자) 협력의 실현 더 높은 수준의 다자 협력 등이었다. 그러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 주도의 신실크로드 구상)’ 전략과 한국 신남방 정책 간 연계 강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조속한 서명 추진 등을 설명했다. 사실상 한국에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아닌 중국의 일대일로에 합류할 것”을 압박한 것이다.

이날 오찬 모임에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도선 CJ 대한통운 부사장, 윤병세 전 외교장관 등 한국 정치·경제·학계 주요 인사 60여명이 참석했다. 왕 부장은 이날 예정 시각보다 37분 늦은 오후 12시 37분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일부 참석자 사이에선 행사 주선자가 40분 가까이 늦은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왕 부장은 이날 지각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나 해명도 하지 않았다. 주한 중국 대사관은 참석자들이 문의하면 “왕 부장이 호텔에 도착해 오찬 장소로 향하는 길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어쩔 수 늦어진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대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중국 대사관은 한국 정·재계 주요인사들에게 오찬 초청을 급하게 추진해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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