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디지털 흔적

조선일보
입력 2019.12.04 03:16

경찰 과학수사대 사무실 앞에서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현대 과학 수사의 개척자로 불리는 프랑스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접촉한 두 물체 사이엔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며 남긴 말이다. 실제로 범행 현장에 출동한 감식반원들은 범인이 무심코 스치고 지나갔을 법한 곳, 만졌을 법한 물건 등에서 1㎜도 안 되는 미소(微小) 흔적을 찾아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포렌식'은 휴대폰, 태블릿 PC, PDA 등 디지털 기기와 서버에 남아있는 범죄의 흔적을 찾아내는 기법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물리적 장소에서만 흔적을 찾는 게 아니라 '전자(電子) 흔적'을 뒤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소에 언제, 어떤 경로로 방문했는지와 같은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록을 지워도 금세 복원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용 인터넷 공간(클라우드)으로 자료가 넘겨져 흔적이 남는 경우도 있다. 한 수사관은 "휴대폰 포렌식을 하면 그 사람의 정신까지 몽땅 털 수 있다"고 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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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일반인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안다.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걸 알아차리면 맨 먼저 해야 할 일로 '휴대폰을 한강에 버리는 것'을 꼽는다고 한다. '1도(망), 2부(인), 3빽'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 휴대폰은 방수 기능이 좋은 데다 수중 금속탐지기 성능도 탁월해 CCTV 등으로 던진 장소만 알면 얼마든지 강에서 꺼낼 수 있다고 한다. 어느 대기업 임원은 "특수 장비로 휴대폰 몸체를 완전히 갈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검찰이 그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출신 수사관의 휴대폰을 경찰에게서 압수했다. 경찰이 애초 확보한 휴대폰을 검찰이 법원 영장을 발부받아 경찰서에서 압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러자 경찰은 "휴대폰 포렌식 과정에 경찰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검찰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여당 지지자들도 "검찰의 휴대폰 압수는 증거 인멸 시도"라고 공격한다. 조국씨 아내가 컴퓨터를 들고 나온 것을 '증거 보전'이라고 했던 궤변이 생각난다.

▶그런데 숨진 수사관의 휴대폰은 아이폰이라고 한다. 미국 FBI도 쩔쩔맬 정도로 비밀번호 보안 강도가 높다. 특히 신형 아이폰은 '비번을 모르면 잠금을 풀 가능성이 제로(0)'라는 말이 있다. 구형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검찰로선 마지막 관문이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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