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항 접근하니 먼저 북송된 선배가 '내리지마, 돌아가' 소리쳐"

입력 2019.12.02 03:00

[재일교포 북송 60년]
- 59년前 북송 후 탈북한 재일교포
"북송선 타기 전날 적십자사 여성 '가겠느냐' 1분간 형식적 질문…
도착한 북한 청진항 온통 잿빛… 사람들 '속은 것 아니냐' 웅성"

"북한에 갈거냐고 다시 묻는다면 9만여명 모두 안가겠다고 할 것"

"조선학교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내리지 마라. 다시 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라."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榮子·77)씨는 59년 전 북송선이 청진항 부두에 접안할 무렵 선착장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학교 선배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도착했던 그 선배는 배에 타고 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북한 군인들이 못 알아듣도록 일본어로 "내리지 말라"고 외쳤다.

지난달 29일, 59년 전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은 가와사키 에이코씨.
지난달 29일, 59년 전 북송선을 탔던 니가타항을 찾은 가와사키 에이코씨. /이하원 특파원
북송 재일교포 가와사키씨는 1960년 고3 때 북송선을 타고 청진으로 들어갔다가 2000년대 초반 탈북해 일본에 정착했다. 오는 14일 '재일교포 귀환사업'이 시작된 지 60년을 앞두고 지난달 29일 니가타항을 방문한 그는 악몽처럼 남아 있는 과거를 회상했다.

가와사키씨는 배가 청진항에 접근할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청진항 일대가 온통 잿빛이었고 높은 빌딩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환영 인파 속 사람들은 쌀쌀한 날씨인데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거나 양말을 신은 사람이 드물었다. '지상 천국'이라던 선전과는 딴판이었다. 배에서 내린 재일교포들이 "속은 것 아니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집단 합숙소에 들어간 가와사키씨와 재일교포들은 첫날 저녁부터 먹을 것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했다. 생지옥 생활의 시작이었다.

가와사키씨는 원래 자신이 태어난 일본을 떠나 북한에 가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4·19가 발생하자 생각을 바꿨다. 조총련이 "한국은 이승만 체제가 곧 붕괴되고 사회주의 통일이 될 텐데 미리 북한에 가서 이를 준비하자"고 선동하는 데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북한행을 말렸지만,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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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재일교포를 태우고 북한으로 갈 선박이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 북·일 양측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000여명의 재일교포를 북송했다. /조선일보DB
"59년 전 북송선이 떠날 때는 굉장한 분위기였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 취주악단이 나와서 계속 쿵작거렸다. 지상낙원에 간다는 들뜬 분위기였다.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나와서 열성적으로 환송했다." 가와사키씨 등을 태운 북송선은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의 인도를 받아서 출항했다. 배가 일본 영해를 벗어날 때 일본 함정에서 "이제 공해로 들어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인사를 했다고 기억했다.

2박3일간 운항했던 북송선에서 북한 관리들로부터 처음 받은 명령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바다에 버리라는 명령이었다. 북한 사람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가와사키씨는 그때 불안감이 엄습했다고 했다. "왜 먹는 음식을 일본 식품이라고 버리라고 하는 걸까. 그러면 '메이드 인 재팬'인 재일교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닐까."

북한으로부터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청진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일본의 가족들이 북한으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나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소학교 4학년인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한 뒤에 만나자는 내용만 계속 써서 보냈다. 절대 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부모는 딸이 '지옥에서 보낸 편지'의 의미를 깨닫고 북한행을 단념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던 것을 지금도 아쉬워했다. "북송선을 타기 전날 국제적십자사의 곱게 생긴 스위스 출신 여성이 나를 심사했다. '본인 의사로 가느냐'는 형식적인 질문이 전부였다. 1분도 채 안 걸렸다. 그때 제대로 심사가 이뤄졌다면 많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을 것이다."

니가타항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던 그가 말했다.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 9만명에게 시간을 돌려서 다시 물어본다면 단 한 명도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가와사키씨는 1987년 북한에서 결혼해 1남4녀를 낳았다. 남편이 사망하고 1990년대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탈북을 결심해 2000년대 초반 딸 하나를 데리고 사선(死線)을 건넜다. 가족들이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는 탓에 자신의 한국 이름과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못한다고 했다.

2004년 일본에 정착한 그는 2007년 '일본인'이 됐다. 일본 국적을 선택한 것은 북송사업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일본 국적이기 때문에 만약 내가 북한의 위협을 받거나 위해를 당하게 되면 일본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귀환 사업에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열심히 나서라는 뜻도 있다."

가와사키씨는 오는 13일 탈북했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재일교포 10여명과 함께 다시 니가타항을 방문한다. 그날 9만여명을 사지로 몰아넣은 북한 정권을 규탄하고 일본 정부에는 책임 있는 해결을 요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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