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北送 재일교포 9만3000명, 그 후 60년

조선일보
입력 2019.11.27 03:15

1959년부터 25년간의 북송사업, 北·日 합작 국가범죄
위안부와 징용공에 분노하면서 북송 교포 문제 왜 침묵하는가

정권현 논설위원
정권현 논설위원

북한 김일성이 환갑을 맞은 1972년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 준비한 선물 꾸러미에는 '인간 200명'이 포함돼 있었다. 조총련 산하 조선대학교 남녀 학생 200명을 환갑 축하 대표단으로 북한에 보낸 것이다. 북한행을 원하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교원들이 나서서 "사회주의 조국 건설의 지도자가 되라"며 등을 떠밀었다. 리스트에 올라간 200명은 '인신공양'이나 다름없었다. 재일교포들의 돈을 뜯어내고 함부로 언행을 못하도록 막기 위한 '인질'이기도 했다. 결국 아무도 되돌아오지 못했다. 누가 이들의 삶을 기억해줄까. 조선대학교에서 23년간 부(副)학장을 지낸 박용곤(92)씨가 2007년 일본 NHK방송에 출연해 폭로하면서 이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졌다. "참회한다. 생지옥으로 제자들을 보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을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북송사업. 이후 1984년까지 25년간 180차례에 걸쳐 9만3000여명이 '지상의 낙원'을 약속받고 일본을 떠났다. 대부분 남한 출신이어서 북한에는 혈연도 지인도 없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일본에서의 민족 차별을 뛰어넘는 계급 차별과 인권침해였다. '불온 분자' '일제 간첩'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고 상당수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소식이 끊겼다. 1990년대의 대기근 때는 더 혹독한 차별과 감시를 받으며 굶주림 속에서 세상을 떴다.

그로부터 60년, 재일민단 중앙본부는 지난 13일 '북송 6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북송은 '사업'이 아니라 '사건'이며, 북한과 조총련에 의한 범죄"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납치 문제와 마찬가지로 북송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여달라고 호소했다. 북송 시작 당시 북한은 6·25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사회 최하층민인 재일교포에 대한 치안 부담과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서로 손을 끌고 등을 밀었다. 일본인들은 김일성의 북한이 생지옥인 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은 비밀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에는 일본 정부의 거짓과 기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일본 정부가 북송을 결정할 당시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다. 문서에 따르면 기시 총리는 "남조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의 협력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했다. '북송 사업'에 인도주의라는 포장지를 씌운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당시 자민당 의원은 '재일조선인 귀국협력회'의 대표위원 자격으로 북송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 일본의 좌파 지식인과 모든 언론이 맞장구를 쳤다. 첫 북송선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가 끊어지는 등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도 일본 정부는 오히려 북한 당국에 북송 규모를 일주일에 1000명에서 1500명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재일교포 북송은 냉전시대 자유 진영에서 공산 진영으로 이민족을 추방한 유일한 경우다. '인종 청소'나 다름없는 국가 범죄라는 지적도 있다. 해방 전 일본군위안부나 징용공 문제에 분노하면서, 전후에 벌어진 재일교포 9만3000명 북송에 대해선 왜 침묵하는가. 대한민국은 국가적 수치의 기억을 덮어버렸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반드시 따지고자 한다면 재일교포 북송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일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계 최악의 독재자를 극진하게 모시기 위해 귀순 의사를 밝힌 탈북 청년 2명을 인신공양 하듯이 강제 송환하는 집단이 권력을 깔고 앉아 있는데, 그런 것을 기대하기란 당분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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