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장 몰아낸 완장정치… 낮엔 비정규직 시위, 6시면 불꺼진 실험실

입력 2019.11.25 01:30

[한국 과학이 흔들린다] [1]
文정부 출범 1년만에, 적폐라며 과학기관 수장 12명 퇴출
연구보다 52시간·정규직 전환 등 靑노동정책 이행에 열중
'박근혜표냐, 문재인표냐' 따지다 달탐사 프로젝트도 휘청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는 작년 11월 신성철 KAIST 총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 시절 해외 연구기관(미 로런스 버클리 연구소)의 장비를 사용하면서 연구비를 이중 지급한 혐의였다. 과기정통부는 "신 총장을 해임하라"고 KAIST 이사회도 압박했다. 하지만 신 총장과 계약했던 로런스 버클리 연구소가 한국 정부 조사단에 "정당한 계약이었다"고 공식적으로 반박했다. 검찰도 지난 1년간 한 번도 신 총장을 소환하지 않았다. 과학계 인사들이 주축인 KAIST 이사회도 정부가 제출한 신 총장 직무 정지 안건을 거부했다. 과학계에선 "신 총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문으로 영남대 이사를 지낸 이력 때문에 현 정부에 적폐의 상징으로 찍힌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7월 1일 오후 8시 30분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건물의 불이 대부분 꺼져 있다.
연구원들 칼퇴, 연구소는 캄캄 - 지난 7월 1일 오후 8시 30분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건물의 불이 대부분 꺼져 있다. 이날부터 정부 연구소들에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일괄 적용되면서 과학계에서는 연구의 질적 하락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전=이태경 기자
1년 만에 과학기관장 12명 쫓아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1년 만에 조무제 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박태현 전 한국과학창의재단 이사장 등 과학계 기관장 12명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다. 임기 2년이 남은 상태에서 사퇴한 임기철 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은 "과기정통부 차관에게 '촛불정권이 들어섰으니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사퇴를 거부하면 과기정통부의 특별 감사가 뒤따랐다. 과기정통부 내 친문 고위 관료들에 대해선 '점령군'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적폐 청산 바람은 한국판 '막스플랑크 연구소'라는 기초과학연구원(IBS)도 뒤흔들었다. 정부는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구노조가 작년 하반기부터 집중적으로 비리 의혹을 제기하자 같은 해 연말 특별 점검에 나섰다. 그리고 종합감사가 뒤따랐고 다시 합동 감사까지 이어졌다. 연구 예산도 7%나 삭감됐다. 이명박 정권 때 만들어진 IBS는 "한국의 연구를 세계화하는 데 도움이 됐으며 특히 IBS의 국제 협력은 한국 과학을 위한 최고의 일"(김필립 하버드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 저널 네이처는 지난 9월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선거 때 개인 연구자 대상 기초연구 예산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공약했는데 이전 보수 정권이 설립한 IBS가 기초연구 예산을 독식하고 있다고 집중 공격했다"고 전했다. 네이처는 "많은 연구자가 IBS에 대한 (정부·여당의) 주장이 과장됐다고 생각한다"며 "IBS가 해외에서 모셔온 세계적 선진 연구자들은 IBS의 본래 철학과 자율성을 잃어버릴까 걱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권 이념의 '실험용 쥐' 된 과학계
사람과 기관뿐 아니라 대형 과학 프로젝트도 적폐로 몰렸다. 정부는 과거 정권의 국정 과제 중 하나였던 달 탐사 사업을 방치하다가 사업 파트너인 미국 NASA(항공우주국)이 달 궤도선 계획을 백지화하는 국제 망신을 당했다. 수소 생산용 차세대 원자로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수소 경제의 핵심 기술이 될 수 있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전면 중단될 처지다.

노동 정책 시험장 된 과학계

반면 과학 정책 당국은 '정규직 전환'과 같은 청와대의 역점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과기정통부가 2017년 10월 발표한 '출연 연구기관 비정규직 6400여명 일괄 정규직 전환'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2400여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대학의 새내기 석·박사들은 정부 연구소 입사는 당분간 포기해야 할 처지다. 연구원의 대규모 정규직 전환을 본 약 2200명의 청소원·경비원도 정규직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는 등 정부 출연 연구소는 쟁의 현장으로 변했다.

공정을 내세운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서는 과학계 내에서도 "말도 안 되는 제도"라는 분통이 터져 나온다. 김창균 한국화학연구원 부원장은 "블라인드 채용으로 다양한 학교에서 인재들이 들어오는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최첨단 분야 연구 인력까지 이렇게 획일적 방법으로 뽑아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연구는 혼자 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같이 하기 때문에 지도교수 등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당 지원자의 연구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게 세계 과학계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권기석 한밭대 교수(공공행정학과)는 "노동정책에 편승한 연구원 채용 변화는 과학계의 수월성 선발 원칙을 무너뜨려 R&D(연구·개발)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일괄 적용되면서 전국의 연구 현장은 오후 6시부터 텅 비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한 책임연구원은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이후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인원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밖에서 보면 불 켜진 연구실도 실제로는 연구 책임자 혼자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구 특성상 24시간 운영되는 장비나 과제가 많은데 연구 인력을 충원하지 못하고 일률적으로 52시간 근로를 준수하도록 하면 연구실 운영이 어려워진다"며 "이미 연구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한 한국인 연구자는 "NIH의 연구실은 24시간 열려 있다"며 "연구 시간은 연구자 스스로 정해야지 제3자가 통제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