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한국식 '벼랑 끝 전술'의 末路

조선일보
  • 태영호 前 북한 외교관
입력 2019.11.25 03:17

북한은 '벼랑 끝 전술'을 中·러와 먼저 관계 다진 뒤 '적국'인 미국을 향해 사용
우리의 지소미아 전략은 동맹을 겨냥했기에 시작부터 실패한 작전

태영호 前 북한 외교관
태영호 前 북한 외교관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6시간을 앞두고 전격적인 조건부 연장을 발표하는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필자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대통령까지도 계속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이번에는 끝까지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 앞에 손을 드는 미국의 모습에 익숙한 전직 북한 외교관인 필자는 이번에 한국의 '벼랑 끝 전술' 앞에서 손드는 미국·일본의 모습을 상상했다. 북한의 대남 관계자들도 필자처럼 우리 정부가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소미아 종료 연기 발표 이틀이 지났지만 북한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좀 당혹한 것 같다. 북한은 22일에도 '지소미아 파기 결정은 응당한 것'이라고 우리 정부에 힘을 보태주었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선언을 한 지난 8월부터 북한 선전 매체들은 지소미아 파기는 '남조선(남한) 민심의 반영'이라면서 "이 협정은 섬나라 족속들에게 군국주의 부활과 조선반도(한반도) 재침의 발판을 마련해 준 전대미문의 매국 협정, 전쟁 협정"이라고 규탄했다. 미국을 향해서는 "일본을 세계 제패 야망 실현의 돌격대로 써먹기 위해 남조선을 일본의 경제 식민지, 대일 종속물, 희생물로 만들려고 지소미아 연기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으로서는 지소미아가 종료되면 한·미 군사동맹과 한·일 공조 중 어느 한쪽 끈이라도 먼저 잘라버리라는 김일성의 '갓끈 전술'이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빛을 보는 '첫 승리'로 되는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대남 전략에 상충되게 지소미아가 '조건부 연장'으로 결정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문제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 한·미, 한·일 관계를 어떻게 지혜롭게 푸는가 하는 것이다. 지소미아 문제의 근본적 해법이 마련되려면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한다. 또 한·미 동맹의 현주소를 바로 보고 현실성 있는 대미 외교를 펴야 한다.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이 소중한 협정을 지렛대로 미국을 한·일 간 경제적·역사적 분쟁에 개입하도록 한 것은 동맹 남용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한·일 정보협력을 중단하겠다는 위협은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발사 대응 능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한국의 안보 이익이 미국과 일본의 안보 이익과 잠재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지금 한·미 동맹은 지소미아 문제와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 문제가 겹치면서 복잡해지고 있다. 반일로 높아졌던 국민 여론이 반미로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방위비 분담 협상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할 것이다.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결정이 한국판 '벼랑 끝 전술'이었다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우리도 '벤치마킹'할 수 있는지 심층 분석이 필요하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로 나가기 전에 중·러와 먼저 소통하여 우방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을 사전 차단한다. 또 북한 '벼랑 끝 전술'의 대상은 적국인 미국이다. 우방인 러시아나 중국을 향해 피말리는 '벼랑 끝 전술'을 쓰면 나중에 어떤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랑 끝 전술'이 먹히지 않아 벼랑 밑으로 떨어질 경우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될 정도의 각오는 가지고 시작한다.

이러한 3가지 요인을 보면 우리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벤치마킹'할 수는 없다. 수출에 의지하는 우리 경제 특성상 경제적으로 동반자이고 외교안보적으로 우방인 일본에 '벼랑 끝 전술'로 대처하려 했다면 시작부터 실패한 작전이다. 외교에서는 한번 큰소리치면 몸이 상해도 일단 나가야 한다. 그래야 다음 번 '벼랑 끝 전술'이 먹힐 수 있다. 결국 '벼랑 끝 전술'은 동맹이나 우방을 향해서 쓸 수도 없고 쓰지도 말아야 하는 협상 전술이다. 이번에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는 모양새가 됐다. 남북이 서로 적대 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자기 우방과의 관계를 잘 다루어 나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북한은 지금 미국을 향해 연말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오라고 압박을 가하면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을 모스크바에 보내는 등 중·러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종료를 강행했다면 한·미 동맹은 수렁에 빠졌을 것이고 한·일 경제 관계는 파국 상태로 갈 가능성이 높았다. 정부가 마지막 순간에 한·미·일 균열로 득 보는 것이 북한·중국뿐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다행이다. 이제라도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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