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11년 동안 고종은 일곱 차례 파천을 시도했다

입력 2019.11.12 03:11

[188] 구한말 각국 문서에 기록된 고종의 일곱 차례 파천 계획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동학군에 전주 함락되자 일주일 만에 미관파천 시도… 이어 영국공사관 파천 요청 모두 거부당해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3개월 뒤 비밀 서신 보내 아관파천 성공
1897년 10월 황제 등극 직후 12월 미관파천 타진, 거부… 미공사관 옆에 도서관 신축
1904년 1월 러일전쟁 직전 신하 시켜 또 미관파천 시도… 공사 알렌, 거부… 프랑스공사관 파천 소문도
1905년 1월 러일전쟁 와중 알렌, 황제 파천 요구 접수… "담을 넘으면 쫓겠다" 보고
1905년 파천 대비해 만든 왕실도서관 '중명전'에서 을사조약 체결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울 중구 정동에 남아 있는 러시아 공사관은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살던 곳이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왕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고 국왕 목숨도 위태로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고 한 번쯤은 이해해보자. 그런데 그 왕은 나라가 풍전등화일 때마다 나라를 버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아관파천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

'영관파천' '미관파천' '불관파천'. 각각 영국과 미국과 프랑스 공사관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치거나 거부당한 사건들이다. 조선 왕국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이명복의 11년에 걸친 나라 탈출극을 살펴본다.

청나라 군사를 부른 왕과 병조판서

가렴주구와 학정에 지친 농민들이 죽창을 깎고 있던 1893년 음력 3월 25일, 고종이 어전회의에서 그 진압 대책을 말했다. "다른 나라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역시 나라마다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다 쓰지 않는가?"(1893년 3월 25일 '고종실록')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민란을 진압하겠다는,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의 아이디어에 대신들이 "어찌 경솔히 논하는가"라고 벌떼처럼 반대했다. 1년 2개월 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병조판서 민영준이 서울에 주둔해 있던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청나라 군사 청병을 실천에 옮겼다.('갑오실기' 1894년 5월 1일) 그해 양력 7월 23일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이니, 이게 청일전쟁이다. 국왕과 처족이 합작해 만든 결과다. 이후 나라는 외세에 짓밟혀 '만신창이(滿身瘡痍)', 온몸에 고름이 흐르는 상처투성이로 변신해 갔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 유적(위 사진).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 유적(위 사진). 1896년 2월 조선 26대 국왕 고종 일행이 파천한 장소다. 고종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 1905년 러일전쟁때까지 끊임없이 외국 공관으로 파천을 시도했다. 당시 미국 공사 알렌은 이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파천'을 '망명(Asylum)'으로 표현했다. 아래 왼쪽은 고종이 미국공사관에 공짜로 내준 길. 지금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고종의 길'이라고 부른다. 왼쪽 담장 너머가 미국공사관이고 오른쪽 나무 뒤편이 러시아공사관이다. 오른쪽 사진은 고종이 파천을 대비해 만든 왕실 도서관 '중명전'. 사진 오른쪽 나무 뒤편이 미국공사관(현 미 대사관저)이다. 이곳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됐다.(모두 적외선 필터로 촬영했다) /박종인 기자
그 고름투성이 나라를, 그 왕은 이후 일곱 번이나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한 번은 성공했고 나머지는 미수에 그쳤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미관파천과 영관파천 미수 각 1회, 1896년 왕비 민씨 살해사건 직후 성공한 아관파천 1회,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미관파천 미수 1회, 1904년 러일전쟁 직전 미관파천 미수 1회와 1905년 러일전쟁 도중 미관파천과 불관파천 미수 각 1회, 도합 5개국 7회다.

청일전쟁과 미관파천

1894년 5월 31일(이하 양력)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했다. 고부와 고창을 비롯해 전라도 6개 고을 군수들이 도주했다. 6월 4일 민영준이 위안스카이에게 청나라 군사를 요청했다. 제물포에는 프랑스와 미군 함대, 청나라와 일본 군함이 입항해 있었다. 6월 8일 청나라 군사가 아산만에 도착했다. 다음 날 '조선에 한 나라가 출병하면 동시 출병한다'는 청일 톈진조약을 앞세워 일본군도 진입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6월 18일 주한미국공사 실이 미 국무장관 그레셤에게 전문을 띄웠다. 내용은 이러했다.

'이미 파천 문제(The matter of asylum)가 언급됐다.'(한미외교관계문서, 1894년 6월 18일 '실이 그레셤에게 보내는 편지') 청일 양국이 진입하면서 고종이 '망명(asylum)' 여부를 타진했다는 것이다. 청일 양군이 개입하자 6월 10일 이미 농민군은 '외세 개입 불가'를 주장하며 관군과 휴전협정을 맺고 군사를 해산했다. 민란이 해소됐으니, 이제 굳이 남의 공사관으로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고종 또한 6월 28일 "분발하고 정신을 차려야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고 대신들에게 각성과 강병을 촉구했다.(1894년 음력 5월 25일 '고종실록')

하지만 속은 달랐다. 각성을 촉구한 다음 날인 6월 29일 미국공사 실은 본국에 이런 전문을 띄웠다. '조선 국왕의 급박한 요청에 의해, 나는 필요한 경우 왕족과 고위 관료의 파천을 수용하겠다(grant asylum to the royal family and other high officials)고 동의했다.' 일주일 뒤인 7월 5일 실은 '비상시 국왕의 파천을 약속했다(promised the King asylum)'고 또 보고했다.(이상 장경호, '청일전쟁 직전 고종의 대미의존 심화와 미관파천 시도', 2018, 재인용) 이게 고종의 첫 번째 미관파천 미수 사건이다. 미 국무부는 "조선 정국에 개입하지 말라"며 거부했다.

영관파천 미수

7월 5일 미관파천에 대한 답신을 기다리는 사이, 고종은 영국 공사관에도 사람을 보내 파천 가능 여부를 물었다. 그날 주한 영국총영사 가드너가 주청 공사 오코너에게 보낸 전문에는 '왕이 사람을 보내 일본인이 왕궁을 포위하는 상황에서 왕을 비밀리에 공사관에 받아줄 수 있는지(receive His Majesty at this Legation) 물어왔다'고 적혀 있다.(한승훈,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영정책 연구', 2015, 재인용) 영국은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두 파천 계획이 무산되자 7월 13일 고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일렀다. "궁색한 재정과 곤궁한 백성 살림을 수습하지 못한 것은 위아래가 안일한 탓이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다가도 일어나 경계하고 가다듬어 정치를 일신하려 하니 깊이 반성하고 내 뜻을 선양할 책임을 다하라."(1894년 음력 6월 11일 '고종실록')

1896년 성공한 아관파천

1년 7개월 동안 '경계하고 가다듬던' 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 1896년 2월 11일이다.

미국공사관 무관 조지 포크가 촬영한 젊은 고종(1884년 추정).
미국공사관 무관 조지 포크가 촬영한 젊은 고종(1884년 추정).
1895년 10월 8일 왕비 민씨가 일본인 무리에게 살해됐다. 1896년 1월 21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비밀 서신을 보냈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며칠 안으로 밤중을 택해 아관으로 피신코자 한다. 날짜를 선택해 알려 달라. 나를 구할 다른 방법은 없다.'(김종헌, '러시아문서 번역집2' p223, 장경호 앞 논문 재인용) 20일 뒤 아관파천은 성공했다.

미국과 파천을 수용한 러시아는 이 기간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경인철도 부설권이 미국에 넘어갔다. 운산금광 채굴권도 미국에 넘어갔다. 함경도 경원과 종성 광산은 러시아에 넘어갔다. 압록강과 울릉도 벌목권도 러시아로 넘어갔다.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황제국임을 선언했다.

환궁 한 달 전 러시아공사관은 "신변 보호를 넘어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환궁할 때 고종은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았다. 고종은 또다시 미국공사관을 노크했다.

1897년 두 번째 미관파천 미수

환궁 후인 1897년 9월 22일 고종은 1892년 미국공사관에 무상으로 줬던 북쪽 길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넘겨줬다. 이 길이 지금 '고종의 길'로 복원된 옛 대사관저 내부 소로다. 그달 30일 미국 공사 알렌이 작성한 미 공사관 주변 지도에는 공사관 서쪽에 '국왕 도서관(King's Library)'이 표시돼 있다. 10월 13일 알렌이 지도와 함께 본국에 보고서를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왕은 우리 공사관으로 오기를 희망한다. 나는 거듭 그에게 파천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파천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왕은 이번에는 소위 '도서관'을 공사관 옆에 짓기 시작했다. 그러면 유사시에 미국이 자기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장경호, 앞 논문 재인용) 도서관 부지는 미 공사관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숙소로 에워싸여 있었다. 알렌은 "우리가 미국 재산 보호를 위해 자기를 보호할 수밖에(compelled)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고 했다.

1897년 12월 24일 황제는 극비리에 내시 한 명을 미 공사관에 보내 파천을 요청했다. 이에 공사 알렌은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라며 파천을 거부했다. 고종이 원구단에 천제를 올리고 황제에 등극한 지 두 달 만이었다. 이듬해 1월 24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러시아 공사 슈페이에르가 항의하자 고종은 "결단코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2권, '미관파천 계획이 폭로된 건에 관한 사실보고')

러일전쟁과 무더기 파천 미수

1904년은 정초부터 만주를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았다. 조선 팔도에 일본군이 속속 상륙했다. 1월 2일 알렌은 대한제국 고위 관료로부터 황제가 파천을 원한다는 간접 요청을 받았다. 알렌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가 다른 고위 관료와 함께 공사관으로 오겠다는 요구를 명백하게 거절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1904년 1월 2일 알렌, 국무부 보고) 2월에 똑같은 요청이 들어오자 알렌은 이 또한 거절했다고 보고했다.(2월 21일 보고) 알렌 또한 보고서에 'Asylum(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무렵 프랑스공사가 황제 측근들에게 일본 은행 예치금을 전액 인출해 프랑스공사관에 보관하라고 제안했고, 측근들이 프랑스공사관에 황제가 묵을 온돌방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일본외교문서' 1904년 1월 4일) 때를 맞춰 무장한 프랑스 해군 39명과 장교 2명이 입국했다.('일본외교문서' 1904년 1월 16일,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p180 재인용)

전쟁이 한창인 1905년 1월 19일 알렌은 또 "황제가 파천을 간청한다는 요청을 조선 관료로부터 접수했다"고 보고했다. 알렌은 "황제가 공사관 담을 넘더라도 내쫓겠다"고 보고했다.(1월 19일 알렌, 국무부 보고) 1905년 미국으로 돌아간 알렌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4000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황현, '매천야록' 4권 1905년)

무더기 파천 미수의 결과

프랑스공사관 파천 첩보까지 포함하면, 고종은 자그마치 일곱 번에 걸쳐 타국 공관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더더욱 지도자가 필요한 때였고 그때마다 나라는 어지러웠다.

1894년 자기가 부른 외국 군사가 백성을 유린할 때 왕은 미국과 영국 공관 파천을 계획했다. 아관파천 1년 동안 숱한 국가 재산이 러시아와 미국으로 넘어갔다. 1897년 황제 등극 이벤트를 펼칠 때 황제는 뒤에서 미관파천을 계획했다. 1904년 나랏돈을 들여서 왕위 등극 40주년 행사를 준비할 때 황제는 뒤에서 미국 공관으로 숨어들기를 원했다.

1905년 나라가 만신창이로 쓰러질 때 황제는 또다시 미국과 프랑스에 몸을 기대려 했다. 열강은 그때마다 자기네 국익을 앞세워 파천을 거부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휘하 대신들을 상대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했다. 그곳이 황제가 만든 왕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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