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내 목에 카드를 건다… "도와주세요, 젊은 치매를 앓고 있어요"

조선일보
입력 2019.11.09 03:00

대화 내용·동료 이름 점점 잊으며 서른아홉에 '장년 치매' 진단
병 걸린 후의 일상 담담하게 적어 치매인에 대한 편견·고정관념 깨
가족이 지켜야할 주의사항도 담아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단노 도모후미·오쿠노 슈지 지음|민경욱 옮김|아르테|288쪽|1만5000원

그 병(病)이 덮쳤을 때 서른아홉이었다.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 둘을 둔 가장이었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병의 이미지가 매우 나쁘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말했다. "알츠하이머로 진단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2013년 3월 '장년 치매' 진단을 받은 단노 도모후미(45)가 2017년 구술한 것을 저널리스트 오쿠노 슈지가 정리한 책이다. 단노는 2015년 5월 자신처럼 치매로 인한 불안을 안고 사는 이들을 위해 고민상담센터 '오렌지 도어'를 설립했다.

수입차 영업사원 단노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기억력이 나쁘구나' 느꼈던 건 2009년 무렵. 통근하는 차 안에서 업무 생각을 하다 문득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리는 경우가 늘어났다. 잊지 않으려 업무 내용을 메모지에 써서 회사 컴퓨터 주변에 붙여 놓았는데, 나중에는 메모로도 모자라 노트로 바꾸게 되었다. 고객과 대화한 내용과 상사 지시를 잊었고, 주요 고객 이름을 잊게 되었다. 3년 후엔 이름뿐 아니라 고객 얼굴도 잊어버렸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직장 동료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말을 걸고픈데 걸 수가 없어졌을 때, 마침내 병원을 찾았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천일의 약속'(2011) 중 주인공 수애가 메모를 하는 장면.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천일의 약속'(2011) 중 주인공 수애가 메모를 하는 장면. 단노 도모후미는 "노트에 일하는 방식과 순서를 적어 업무를 해냈다"고 말한다. /SBS
책은 흔히들 '본인은 천국이지만 가족들은 지옥'이라 말하는 치매에 대한 편견을 깬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치매인은 난동을 부린다'는 편견에 대해 단노는 말한다. "'뭘 하는 거야!' '왜 틀리는데?' 같은 말을 들으면 치매인은 상처를 받는다.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그 감정은 곧 분노로 바뀐다. '어떻게?' '왜?'라고 물어봤자 자신도 모르니까. 바로 그것이 치매라는 병이기 때문이다."

치매인은 웃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고정관념도 깬다. 단노는 "초기엔 매일 울었지만 같은 병을 앓는 분으로부터 '억지웃음이라도 좋으니 웃어라. 그럼 진짜 웃음이 나올 것'이란 충고를 듣고 노력했더니 조금씩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정말 웃음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늘 웃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단노씨는 치매가 아니야. 오진이 분명해"라고 할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것 같다.

치매인 가족을 위한 팁
치매를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걱정이 된 건 생계였다. '세차하는 일이라도 해보겠다고 부탁해야지' 결심했는데 의외로 회사는 관대했다. 영업부 대신 총무부로 옮겨 퇴직금 관리를 맡겼다. 일자리는 잃지 않았으나 쉽지는 않았다. 운전을 할 수 없어 지하철로 통근했는데, 자주 길을 잃어 허둥댔다. 고민하다 회사 주소와 함께 "장년층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쓴 카드를 만들어 목에 걸었다. 길을 잃었을 땐 카드를 보여주며 도움을 청했다. 처음엔 부끄럽고 불안했지만 의외로 세상은 따스했다. 도움의 손길이 선뜻 다가왔다. 단노는 "카드는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니게 해 준 부적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치매인 가족의 주의 사항도 알려준다. 진행을 늦추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게 하거나 계산을 시키는 건 금물. 치매인 대부분은 가족에게 폐 끼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싫어도 억지로 하는데, 그 스트레스가 병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괜한 짓을 하는 대신 매일 웃으며 밝게 살아가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치매 진행이 느린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산다." 치매인이 행동이 느리다고 '내가 하는 편이 낫겠다'며 대신 해버리는 것도 좋지 않다. 치매인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편이 좋다.

담담하게 적어간 이야기. 그러나 "나는 치매인이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불결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며 마음 다잡던 단노가 딸들이 치매 아빠를 뒀다고 놀림받지 않을까 마음 졸이는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2018 대한민국 치매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치매 환자 73만명 중 65세 미만 젊은 치매 환자는 약 7만명. 치매인 중 10%가 '젊은 치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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