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는 고독

입력 2019.11.08 03:03

에드워드 호퍼, 12세 때 183㎝ 큰 키 때문에 항상 놀림받아
그림엔 사무치게 외로운 고독… 타고난 결점으로 괴로울 때 그의 큰 키가 위로로 다가와

곽아람 문화부 차장
곽아람 문화부 차장
소년은 12세 때 이미 183㎝ 가까이 됐다. 큰 키는 결코 자랑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래스호퍼(grasshopper·메뚜기)'라 놀렸고, 따돌림당한 소년은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의 그림 속 고독은 아마도 상당 부분 지나치게 큰 키에서 기인했을 거예요." 어느 여름날 미국 뉴욕주(州) 나약(Nyack)의 에드워드 호퍼 하우스에서 에드워드 호퍼(Hopper·1882~1967)의 큰 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호퍼가 태어나 1908년 뉴욕으로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 1층 방 문설주에 그가 12세 때 키를 잰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우스 투어를 맡은 인턴이 그 아래 서 보라고 하더니 "어디 한번 비교해 봐요. 정말 크죠?" 하며 웃었다. 호퍼는 이후 196㎝까지 자란다.

세련된 '고독의 화가'라 여겼다. 한밤중 뉴욕, 간이식당에 앉아 있는 인물들을 그린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이라든가, 호텔방 침대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를 그린 '호텔방'(1931), 잘 차려입고 홀로 커피를 마시는 '자동판매기 식당'(1927)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호퍼 그림 속 인물들은 어쩐지 고독을 자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독한 사람들이 아니라 고독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고독이 감정의 사치가 아니라 누구와도 쉽게 눈 맞출 수 없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짊어진 천형(天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이 화가가 사뭇 가깝게 느껴졌다.

에드워드 호퍼가 8세 때 그린 자화상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가 8세 때 그린 자화상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 /에드워드 호퍼 하우스 소장

호퍼가 8세 때 성적표 뒷면에 펜으로 그린 자화상이 생가에 걸려 있었다. 뒷짐 진 채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짙은 고독이 묻어났다. 그의 그림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만큼 고독한 그림은 없었다. 천재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호퍼가 썼던 2층 침실 창으로 멀리 강이 내려다보였다. 외로운 소년 호퍼는 부두에 쭈그리고 앉아 들고 나는 배들을 바라보며 그를 그림에 담곤 했다. 배를 설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오랫동안 호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나 도회적이라, 멋있긴 한데 사귀기엔 부담스러운 남자 같았다고나 할까. 비로소 그를 이해하게 된 건 회사 연수차 1년간 뉴욕에 살게 되면서였다. 맨해튼에 살았던 그가 왜 그렇게 밤에 남의 집 창을 들여다본 풍경을 많이 그렸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찬 맨해튼에선 밤이면 앞집 창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호퍼의 '밤의 창문'(1928) 같은 풍경. 비로소 호퍼가 궁금해졌고, 결국은 생가까지 찾아가 보게 되었다.

맨해튼 포트 오소리티 터미널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 인구 67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나약은 나약해 보이는 이름과 달리 옹골차게 아름다운 동네다. 호퍼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풍스러운 집들. 호퍼 그림 속 집은 대개 화가의 기억 속 장소들을 짜깁기해 재창조한 '심리적 산물'인데, 생가를 비롯한 고향의 집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눌변에 수줍은 성격, 작품에 대해 질문받을 때면 "모든 답은 캔버스에 있다"고 간명하게 답했다는 이 화가는 84세로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숨을 거둔 후 어린 날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그 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약의 묘지에 묻혔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후 종종 생각한다. 약점은 어떻게 재능이 되는가. 타고난 결점이 도드라져 괴로운 날이면, 호퍼의 큰 키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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