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93종의 글씨체… 한글, 너 이렇게 예뻤니?

조선일보
입력 2019.11.07 03:00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7] 다양한 서체로 진화하는 한글
고딕·명조·궁서 정도였던 글꼴… 을지로체·블랑·펜바탕·옵티크 등 디자이너의 개성 강조하며 다변화
기업들도 정체성 담은 서체 개발
K팝으로 해외 팬들에게도 인기

"나 지금 궁서체다(진지하다)." 요즘 인터넷에서 궁서체란 명사는 '진지하다'란 형용사로 쓰인다. 궁서체로 쓰면 상장(賞狀)처럼 엄중해 보인다는 데서 왔다. 우스개 안에 중요한 사실이 있다. 말투 따라 말맛이 다르듯 글씨체에 따라 전달되는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한글 서체라면 고딕·명조·궁서 정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한글 서체는 훨씬 풍부해지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올해 서체 개발사 30곳을 조사해보니, 이 회사들이 보유한 한글 서체만 6693종이었다. 국내 개발사가 총 60여곳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 열풍이 서체 다변화의 중요한 계기로 꼽힌다. 미니홈피를 꾸미기 위한 다양한 서체가 개발되고 이를 구입해 사용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K팝 열풍으로 한글 서체는 해외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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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개성의 한글 서체들. ①산돌커뮤니케이션 '눈솔'의 획을 모아 재구성한 그림. ②노은유의 '옵티크'. ③윤민구·김지은 '블랑'의 획으로 만든 모양자. ④⑤함민주의 '둥켈산스'. ⑥양장점 '펜바탕' 전시회 포스터(디자인=신신). ⑦아한형제들 '을지로체'의 바탕이 된 을지로 일대 간판들. ⑧완성된 을지로체.
◇개인 서체 디자이너들의 약진

한 칸의 글자. 그 미시(微視)의 세계에서 우리 글을 아름답게 가꾸는 디자이너들도 늘고 있다. 디자이너 윤민구·김지은은 지난해 '블랑'을 선보였다. 가로·세로획의 두께 대비가 뚜렷해 "날카로우면서 부드러운 감수성을 동시에 지닌" 서체다. 김지은의 '꽃담체' 스케치(2014)를 바탕으로 윤민구가 협업했다. 지난달 나온 노은유의 '옵티크'는 한글의 붓, 영어의 브로드닙(납작 펜촉)이라는 필기구 특성을 살리면서 두 문자의 시각적 조화를 꾀했다. 양장점(디자이너 양희재·장수영)의 '펜바탕'은 손으로 쓴 펜글씨처럼 살짝 기울어진 모양이 특징. 함민주의 '둥켈산스'는 1950년대 영화 포스터의 제목 글씨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주 짙고 힘찬 제목용 서체다.

한글이 배우기 쉬운 문자인 데 반해 서체 디자인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작업량이 방대하다. 컴퓨터용 서체 한 벌을 만들 때 영어는 대·소문자와 숫자 등 94자가 필요하다. 한글은 적어도 2350자, '뷁'처럼 유행어·신조어에 쓰이는 글자까지 아우르려면 1만1172자까지 늘어난다. 전 세계에 판매 가능한 로마자와 시장 규모부터 차이가 난다. 서체 디자이너의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구조다.

여건은 나아지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유지원은 저서 '글자풍경'에서 2010년대 이후 한글 서체 디자인 분야의 특징으로 '개인 디자이너의 약진'을 들었다. 소셜미디어 등 서체 유통·홍보 경로의 등장,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제작비 확보, 제작 기술의 발달 등에 힘입어 혼자서도 서체를 디자인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해외에서도 한글 서체는 인기다. 서체 개발사 산돌커뮤니케이션은 지난 7월 K팝 팬들의 활동용으로 일부 서체를 무료 개방했다. "한국 지하철역에 스타 응원 광고를 걸고 싶은데 서체 사용 절차를 알려달라"는 해외 팬들의 문의가 빗발친 데 따른 결정이다.

◇기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한글 서체

기업들도 한글 서체를 만든다. 개발한 서체를 무료 개방하기도 한다. 업종 무관이다. 우아한형제들은 배달 음식 주문 앱이 본업이지만 2012년 '한나체'부터 올해 '을지로체'까지 여덟 가지 서체를 만들었다. 재미있어서 만든 서체로 유쾌한 전시를 열고 즐거운 사풍(社風)을 드러낸다. 게임 회사 넥슨, 식품 회사 빙그레도 지난달 직접 개발한 한글 서체를 배포했다. 떡볶이의 쫄깃함을 담았다는 '국대떡볶이체'도 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한 곳으로 아모레퍼시픽이 꼽힌다. 2005년 개발한 '아리따 돋움'을 이듬해 개방했다. "품격 있는 말씨를 사회와 나눈다"고 했던 취지에서 서체가 곧 말씨라는 생각이 드러난다.

필적(筆跡)이 인물의 개성을 나타내듯 서체는 기업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드러낸다. 기업 정체성(CI), 브랜드 정체성(BI)에 이어 서체가 기업의 정체성을 전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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