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ASEAN) 관련 정상회의에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타결 소식이 들려온 4일(현지 시각) 미 국무부는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여를 최우선 사안으로 여긴다'고 강조하는 보고서를 새롭게 발표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중국이 주도해 온 RCEP 타결이 '중국의 승리'로 해석되는 상황을 다분히 의식한 조치였다. 미국의 중국 견제 구상으로 불리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협조하라는 미국의 대(對)한국 압박도 더 커질 전망이다.
국무부가 발간한 보고서 제목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공유 비전의 증진'이었다. 중국 견제라는 '비전'을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맞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의 주도권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구상을 담은 표현이다. 보고서 인사말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미국 관여를 행정부의 최우선 순위에 둬 왔다"며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깊은 관여와 번영에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의 이런 다짐은 역설적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며 다자(多者) 외교를 등한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성향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회의감을 반영하고 있다. 매년 아세안 정상회의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와 함께 열린다. 전임 미국 대통령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나 올해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는 트럼프 대통령, 펜스 부통령, 폼페이오 장관이 모두 불참했다. 역내 국가들이 '미국의 무관심'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아세안 10개국은 물론 미국의 동맹인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까지 총 15국을 아우르는 RCEP 협정을 타결했다. 협상에 참여한 16국 중 대중(對中) 무역 적자 폭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인도가 협정문 서명을 보류하면서 정식 발효는 내년으로 미뤄졌다. 그러나 세계 GDP 30%를 아우르는 거대한 경제권의 출범을 예고한 진전이었다.
중국은 지난 2011년 미국 정부가 추진하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맞서 RCEP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역내 여러 국가로 확대한 TPP나 RCEP는 흔히 '메가 FTA'로 불린다. 많은 나라가 참여하는 만큼 무역 자유화의 수준은 FTA보다 낮지만 역내 국가를 하나의 권역으로 묶는다는 점에서 안보적 의미가 크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진하며 TPP를 역점 사업으로 간주했다. 중국의 부상을 경계하던 일본도 TPP 추진에 적극 동참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월 취임 사흘 만에 '오바마 정책'인 TPP 탈퇴를 선언했다. TPP 추진에 사활을 걸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RCEP로 정책의 중심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미·중 간 세력 대결의 양상은 이번에 RCEP가 타결되는 과정에서도 엿보였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중국과의 무역 적자가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하며 추가 협상을 요청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을 처음 주창한 아베 총리도 인도의 입장을 측면 지원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RCEP로 막아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는 "아세안 블록은 미 행정부의 적대적 무역 정책의 타깃이 돼 있다"며 "설령 중국과 경제적으로 더 가까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세안 국가들이 단결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 타임스는 RCEP 타결에 대해 전문가를 인용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를 거부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큰 승리"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