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기자 꿈꿨지만, 3代 화장품 유전자를 따랐죠

조선일보
입력 2019.11.06 03:01 | 수정 2019.11.06 17:03

佛 화장품 '시슬리' 회장, 필립 도르나노… 할아버지는 '랑콤' 공동 창업자
아버지가 세운 '시슬리' 물려받아 최고 전성기 구가하는 CEO
"내가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말단부터 시작해 혁신 일궜죠"

"얼마 전 프랑스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는데 아주 독특한 가족 경영(family business)이더군요!"

최근 서울에 온 프랑스 유명 화장품 기업 시슬리의 필립 도르나노(55) 회장이 가족 경영 회사인 시슬리를 '기생충'에 빗대 농담을 던지자 폭소가 터졌다. "한국에선 당신 같은 사람을 '금수저'라고 부른다"는 말엔 다부지게 맞받아쳤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올라온걸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2세대 전에 몰락했지요. 프랑스엔 돈 없는 귀족도 많아요. 몰락한 가문을 세우느라 할아버지 때부터 꽤 애를 먹었답니다(웃음)."

화장품 DNA는 3대에 걸쳐 다져졌다. 할아버지인 기욤 도르나노는 1930년대 '랑콤'을 공동 창업한 주역. 아버지 위베르노 도르나노는 1950년대에 화장품 회사 '올랑'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1976년 시슬리를 설립했다. 시슬리는 식물 추출물을 이용한 피토(phyto) 개념을 선도적으로 도입해 혁신을 일궜다. 이때만 해도 화장품에 천연 식물 추출물을 넣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명품' '럭셔리' 소리를 듣는 건 단지 가격이 비싸서만은 아니다. 에뮐시옹 에콜로지크 등 40년 스테디셀러 제품을 보유한 장수(長壽) 브랜드로 살아남은 건, 결국 품질이 남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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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도르나노 회장은 “얼마 전 봉준호 영화 ‘기생충’을 봤다”며 가족 경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시슬리에 빗대 농담하기도 했다. “우리처럼 아주 독특한 가족 경영(family business)이더군요!” /이태경 기자

전 세계 5000여 직원을 둔 글로벌 회사 최고 경영자인 그가 1986년 영업 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만 해도 직원 100여 명의 작은 회사였다. 파리정치대학에서 법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시 쓰기를 즐기던 문학 청년은 뉴욕타임스 인턴을 하며 기자를 꿈꿨지만 가업(家業)을 잇기로 한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자 대신 시슬리에 입사했다.

세일즈팀 말단 사원일 땐 프랑스 각지에 있는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위해 매주 1500㎞씩 차를 몰았다. "직업윤리(work ethic)를 매우 중시한 부모님 덕에 우리 집안엔 근면함이 흘렀습니다." 행사 초청장과 감사 메일 쓰는 일부터, 농장에 나무 심고, 잔디를 깎고, 트랙터 모는 일까지 했다. "시간당 5프랑씩 받고 10대 남자애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봤지요."

끊임없는 호기심은 어릴 때부터 가족이 함께 역사·예술·정치 분야를 가리지 않고 토론을 벌이며 키웠다. 책벌레이기도 하다. 1년에 50권 정도 읽는다. 기자의 꿈은 프랑스 경제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담은 신문 기고문 등을 통해 해소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행해서일까. 2013년 그가 CEO에 오른 뒤 지난 3년간 시슬리의 총매출은 3분의 1가량 증가했다. 모든 국가에서 꾸준히 성공적인 성적을 내고 있다. 고객과의 인간적인 교류(human touch)를 중시해 전 세계 3500~4000명 정도의 스페셜리스트(전문가)를 키워낸 것도 무기가 됐다. "요즘 뷰티 시장이 천연 식물 추출물·활성 성분 등에 주력하는 걸 보면 우리가 선구자였어요. 1960년대 말 여러 실험을 한 아버지는 활성 성분을 전문화한 브랜드가 바로 미래라고 하셨지요." 사람들은 비싼 가격 때문에 '럭셔리'라고 불렀지만 그는 "가격에 얽매이지 않고 충분히 실험해 최고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다"고 했다.

그에게 시슬리의 가장 좋은 제품을 추천해보라고 하자 표정이 난감해졌다. "병원에서 필요한 약을 처방받아야지 좋아하는 약을 달라고 하진 않잖아요? 화장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럭비광으로 알려진 그는 스포츠를 예로 들며 "피부 관리는 방법론"이라고 했다. "팀에 다양한 포지션의 선수들이 있듯, 화장품에도 각각의 라인이 있어요. 취향이나 나이, 필요에 맞는 제품을 써야죠. 화장품은 늘 젊어 보여야 한다는 꿈을 실현해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걸 받아들이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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