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차별 없이 중용한 세종… 지금은 이런 리더 없나요

조선일보
입력 2019.11.05 03:00

['세종 평전' 펴낸 한영우 교수]
"한글 창제만큼 위대했던 것은 신하·백성의 말 경청한 리더십
중요 안건에 찬반이 갈리면 합의 이를 때까지 끝장 토론
모든 게 내 탓이라던 세종은 정조보다 한 수 위의 정치 10단"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약점이 다수결이에요. 소수의 반대 의견은 묵살되잖아요. 소수가 대들면 다시 누르고."

지난 1일 한영우(81) 서울대 명예교수의 연구실인 서울 관악구 낙성대 인근의 '호산재(湖山齋)'. 최근 '세종 평전'(경세원)을 펴낸 그의 말을 받아 적다가 멈칫했다. "다수결은 소수의 반발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정치예요. 하지만 다수의 의견은 진선진미(盡善盡美)고, 소수는 언제나 나쁜 건가요? 정치가 숫자 놀음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한 교수의 느긋한 말투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영우 교수의 연구실 '호산재'에는 1938년 한 교수의 가족이 고향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후에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한영우 교수의 연구실 '호산재'에는 1938년 한 교수의 가족이 고향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후에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팔을 든 갓난아이가 한 교수다. 그는 "평전을 쓸 때 유년 시절의 정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어릴 적 경험과 정서가 평생 영향을 미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상훈 기자
한 교수가 다수결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모델로 제시한 것이 '세종의 리더십'이다. "중대한 안건을 결정할 때는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항상 대신들의 중론(衆論)을 모았다. 그마저 찬반이 나뉠 때는 합의에 이를 때까지 '끝장 토론'을 한 뒤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백성의 이해와 직결되는 조세 제도인 공법(貢法) 제정을 실례로 들었다. 세종은 시안을 만든 뒤 1430년 전·현직 관료는 물론, 시골 촌부까지 전국 17만 명을 대상으로 가부(可否)를 묻는 여론조사에 들어갔다. 한 교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였다"고 평했다.

찬성 의견이 더 많았지만 세종은 일부 지역의 시험 적용을 통해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문제점을 끊임없이 수정·보완했다. 결국 14년 뒤인 1444년에야 '공법' 개정안을 최종 확정했다. 한 교수는 "세종은 무엇보다 '졸속 행정'을 싫어했고 불평불만으로 인한 갈등이나 뒷말이 생기지 않도록 '끝장 토론'을 선호했다"면서 "이 때문에 실록을 읽고 있으면 세종의 인내심에 답답할 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세종 평전'은 2017년 한 교수가 '정조 평전'을 펴낸 뒤 2년간 매달린 결과물이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 성군으로 꼽히는 두 국왕에 대한 평전을 연이어 펴낸 것이다.

한 교수는 세종을 '수성(守城)의 리더십', 정조를 '중흥(中興)의 리더십'으로 분류했다. 세종과 정조는 화법(話法)마저 지극히 대조적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어요. '온 냇가를 비추는 밝은 달' 같은 초월적 존재, 요즘 말로는 '수퍼맨'을 자처한 거죠. 반면 세종은 언제나 일을 하고 나서도 무능한 임금이라고 한탄하는 쪽이었어요. 생전에는 자책하고 후회만 했는데 죽고 나서 신화가 됐다고 할까요." 세종은 신하들과 대화할 때도 먼저 결론을 내리거나 단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던지거나 신하들의 말이 옳다고 격려한 뒤 마지막에 넌지시 자신의 뜻을 전하는 방식을 택했다. 한 교수는 "진짜 성인은 자신을 치켜세우는 법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세종이야말로 '정치 10단'이었고 정조보다 한 수 위였던 셈"이라고 했다.

이 책은 찾아보기와 연표를 포함해 880쪽에 이른다. 한 교수는 1418년 세종의 형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부터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대순으로 주요 사건과 쟁점을 정리한 편년체 서술 방식을 택했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는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와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역할에 주목했다. 당시 세종은 눈병 등을 핑계로 경연(經筵)을 거른 채 궁 밖에 출입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자주 방문한 곳이 정의공주와 광평대군의 집이었다. 한 교수는 관련 기록을 토대로 "아들 딸의 집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비밀 아지트로 활용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 재위 당시의 시대적 특징으로 '흙수저의 전성시대'를 꼽았다.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으로 관노에서 종3품에 올라서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한 장영실(蔣英實)이 대표적이다. 한 교수는 "세종은 서얼과 노비, 여진 출신 등 신분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는 중용했다는 점에서 '개방적 인사 정치'의 달인이었다"고 평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한 교수는 "만약 세종이 지금 살아 있다면 갈등과 대립의 대한민국 리더를 맡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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