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강요당해 중학교 자퇴… 도서관에서 종일 책만 읽었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11.02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해방되던 해인 25세 때까지 그런 삶을 살았다. 10대 중반부터 10여 년은 태풍 밑에서 살아남은 셈이다.

숭실 중학 3학년을 마칠 때 우리 학교는 폐교 운명에 직면했다. 일제 때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며 선교사인 교장이 추방당했다. 떠나면서 학생 500명에게 고별사를 했다.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쳐들면서 "Do, Do"라는 함성을 일곱 번 소리쳤다. '선조나 선배처럼 약자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나라를 되찾고 인간답게 살라는 호소였다.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신사 참배를 하며 학교에 머무를 것인가, 거부하고 떠날 것인가. 같은 반 윤동주는 만주 간도로 떠났고 나는 자퇴했다. 고향 교회의 김철훈 목사와 장로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한 죄로 고문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앙적 양심과 애국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나도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다른 학우들은 신사 참배를 하더라도 학업을 계속했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평양 부립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자전거로 통학하던 때였다. 오전 9시에 도서관에 도착해 오후 5시까지 독서했다. 당시 내 모습을 회상할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년이 지났다. 개학 때 나는 다시 교복을 입고 학교에 찾아갔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돌아와야 했다. 층층대를 올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였다. 복도를 지나가던 김윤기 선생이 "너, 형석이구나!"라면서 나를 이끌고 다니며 재입학 절차를 밟아주었다. 마치 '우리가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지 모르지?'라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다시 학생이 된 첫날, 신사 참배를 가야 했다. 평양 신궁 앞에 줄지어 섰다. 체육 선생이 구령을 내리고 우리가 90도로 절하고 퇴장할 때였다. 맨 앞에서 경례하고 돌아서는 교장의 주름 잡힌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진 것이었다.

그해에 나는 가장 행복한 학교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 품을 떠났다가 돌아온 어린애 같은 1년이었다. 내가 나중에 제자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었다면 그 1년 동안 사랑 있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에 일제는 우리 학교를 폐교하고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개편했다. 일본 학생들과 공학하는 황국 신민 양성소로 만들었다. 그 1년 동안은 소년 교도소 같은 생활을 했다. 교내에서는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학생들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키우려던 식민지 교육과 정치 이념 수단으로 삼는 공산 치하의 교육을 보면서 나는 교육의 의미와 희망을 깨달았다. 한편으론 고마운 일이었다. 사랑이 있는 교육의 가치를 그때 알았다. 힘든 과거가 내게 남긴 유산이다.

그보다 더 감사한 것이 있다. 1년 휴학하는 동안 독서를 통해 오늘의 내가 태어난 것이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그 독서가 나를 정신적으로 키워주고 철학도로 이끌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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