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人이 고백하는 내 인생 최악의 실패, 최고의 교훈

조선일보
입력 2019.11.02 03:00

[아무튼, 주말]

맹추위에 한시간 줄섰어도 사지못한 볼펜…
내 사상적 실패는 그 줄에서 시작됐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드디어 내 차례였다. 바르샤바의 겨울 추위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한 시간 가까이 긴 줄에서 기다리며 버틴 보람이 있었다. 미리 폴란드어 사전에서 찾은 볼펜이라는 말의 '드우고피스'라는 단어를 호기롭게 외쳤지만, 가게 주인은 내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진땀을 흘리며 두세 차례 더 반복했지만,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내가 질퍽거리자 긴 줄의 뒤에서 원성들이 쏟아졌다. 사람들의 원성을 더 버틸 배짱이 없던 나는 다시 줄의 맨 뒤로 가야 했는데 뱀처럼 구부러진 줄이 얼마나 긴지 확인하고는 볼펜을 포기했다. 1990년 12월 바르샤바에서의 내 첫 쇼핑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프라하에는 체코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뒤에 거느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스탈린 동상이 있었는데, 스탈린의 함박웃음은 그가 줄의 맨 앞에 서 있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회자되던 때였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물건을 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농담이 아닐 수 없다. 남 대신 줄을 서주고 약간의 수고료를 받는 게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의 주요 부수입이던 그런 시절이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유행한 촌철살인의 정치적 유머들은 리얼리즘의 '하이쿠' 같다. 정치적 유머를 통해 '사회주의의 사회문화사'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정치 유머들을 찾아보고 수집한 적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유머는 이렇다.

15人이 고백하는 내 인생 최악의 실패, 최고의 교훈
1980년대 초 군대를 동원해 연대노조 운동을 진압한 야루젤스키 장군이 부처 순시에 나섰다. 경제 부처의 장은 앞으로 수년 내에 모든 폴란드 가정이 자가용 비행기를 가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잠시 흐뭇했지만, 곧 의문이 일었다. 굳이 모든 가정이 자가용 비행기를 가질 이유가 있냐는 장군의 질문에 경제 부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들은 곧 이렇게 부연 설명했다. 바르샤바의 시민들이 바르샤바에서 화장지를 못 구하면 자기 비행기를 타고 크라쿠프로 날아가서 화장지를 쉽게 살 수 있고, 또 크라쿠프에서 감자를 살 수 없는 동무들은 재빨리 포즈난으로 날아가 감자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폴란드의 하늘이 화장지와 감자를 찾아 날아다니는 자가용 비행기들로 시커멓게 덮이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1990년 겨울 나는 '폴란드의 사회주의와 애국주의'라는 연구 주제를 갖고 폴란드 땅에 첫발을 디뎠다. 1990년대 내내 폴란드 연구에 매달리면서, 음험한 정치권력 앞에 선 사회주의의 찬연한 이상은 불 앞의 얼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가 해온 사상사 연구가 이상의 신기루를 좇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엄습했고, 내 이상은 현실 앞에서 길을 잃었다.

유신 독재와 전두환 군부 독재의 암울한 터널에서 청년기를 보낸 내 세대의 대부분은 극히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정권의 '반공 선전'이나 반체제적 '공산주의 선전' 둘 중 하나였다. 사회주의를 악마화하는 우익 독재정권의 반공선전이나 자본주의를 악마화하는 스탈린주의 교리문답이나, 조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성이 삐딱한 나는 권력보다는 반권력의 편이었고, 반공 선전에 신물이 난 터라 차라리 신선해 보이는 스탈린주의 선전을 택했다. 바르샤바대학 도서관이나 중고책방에서 구한 로자 룩셈부르크 등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들고 다니는 내게 폴란드 젊은이들이 던지는 경멸적 눈초리를 느끼면서 나는 최악의 사상적 실패를 예감했다.

공산당 독재를 거치면서, 사회주의가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이념체제라고 경험으로 체득한 그 젊은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 책을 끼고 다니는 나는 '반동적' 지식인이었다. 노동자가 주인인 국가가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억압하는 그 희한한 체제가 유신독재의 대안이라 생각했으니 실패를 넘어 파국이었다.

우익 군사독재의 '반공 선전'을 택했다고 최악의 사상적 실패가 없었다고 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 스탈린주의'를 도모했던 박정희 체제 신봉자들의 사상적 파국은 희대의 박근혜-최순실 스캔들로 귀결되었다. 박근혜 탄핵에 찬성함으로써, 이 우파들은 자신들의 사상적 실패를 자인했다. 그래도 미심쩍으면 왜 좌파의 최대 우군이 '자유한국당'인지 곱씹어 볼 일이다.

1970~80년대에 청년기를 거친 우리 세대는 모두 사상적 실패의 운명을 안고 있다. 그것은 냉전체제의 원죄이기도 한데, 문제는 오늘날 탈냉전 시대에도 그런 조야한 이분법적 선전이 좌든 우든 현실을 판단하고 개입하는 준거 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폴란드의 냉전 우파와 한국의 냉전 좌파가 놀랄 만큼 닮은꼴인 것도 냉전의 이분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한 폴란드 친구의 농담처럼, "자본주의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밟고 서 있는 체제라면, 사회주의는 거꾸로 다른 인간이 한 인간을 밟고 서 있는 체제이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서 있으면 정의롭고 다른 사람이 내 위에 서 있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많이 닮아 있다.

좌우 양손에 촛불을 들고 최악의 실패를 향해 질주하는 한국 사회라는 폭주 기관차를 멈추려면, 냉전적 이분법을 깨는 게 급선무다. 인간이 인간 위에 서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다 같이 넘어설 수 있는 상상력에 불을 붙일 때, 희망은 더 이상 외래어가 아니다.

당일 아침에도 사표 쓸 줄 몰랐다… 난 내 단점에 감사한다

장강명 소설가


소설가 장강명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어떻게 해서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신 거예요?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어요? 아니면 계획하신 거예요?" 내가 아무런 계기도 계획도 없었다고, 어느 날 울컥해서 사표를 썼다고, 그날 아침까지도 그날 사표를 쓸 줄 몰랐다고 말하면 다들 놀란다. 몇몇은 멋지다, 부럽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반응에 나는 복잡한 심정이다. 어쩌다 보니 '퇴사'가 요즘 시대의 힙한 트렌드가 된 것 같은데, 나는 힙하지도 트렌디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 즈음 고민이 많았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에도 회의가 들었고, 소설을 쓸 시간이 없는 것도 불만이었다. 늘어놓자면 이것저것 길게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사 안에서는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이리저리 들이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꽤나 배려받는 12년 차 기자였다. 간부들에게 "나를 믿고 일주일에 지면 한 면만 달라"고 평기자로서는 가당치 않은 요구를 해서 일을 벌였다가 시원하게 말아먹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기사 한 건이 결정적 한 방이 됐다. 나를 믿었던 취재원의 뒤통수를 세게 치는 기사였다. 신의와 기사 가치가 충돌할 때 기자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해야 한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해왔고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그날은 자신이 없었다. 종일 데스크에게 사정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다가 저녁에 지방판 마감을 앞두고 원고를 넘기지 않은 채 전화기를 끄고 집에 가버렸다. 그날 밤 사표를 써서 이메일로 보냈다. 이후 일주일이었는지 열흘이었는지, 한동안 전화기를 켜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냈다. 여러 감정이 폭발했는데 그중 가장 큰 두 가지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었다. 두려움이야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하는 것이었고, 부끄러움은 동료들에 대한 것이었다.

당일 아침에도 사표 쓸 줄 몰랐다… 난 내 단점에 감사한다
일러스트= 안병현
다음 주 예정이었던 같은 팀 후배의 휴가는 취소됐을 테고, 팀장은 내가 쓰던 아이템들을 떠안아 허리가 휘어질 테고, 날 밀어주던 데스크들은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막연히 퇴사를 꿈꾸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선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가는 모습을 그렸다. 나는 대인 기피증을 앓았다.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며 한심하다, 뻔뻔하다, 무책임하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주일이었는지 열흘이었는지 그렇게 지내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켰다. 전화기가 몇 분 동안 진동하며 문자 메시지 수백 건을 토했다. 원망이나 질책 하나 없이 모두 나를 걱정해주는 내용이었다. 아무 염려 말고 그냥 돌아와. 선배 꼭 돌아오세요. 강명아 제발 전화 좀 받아. 강명씨 몸은 괜찮은 거죠? 사표는 종이 문서로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새벽에 회사에 가서 부장 자리에 사직서를 두고 나왔다.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패배자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존경하던 선배는 '이런 식은 아닌 것 같다'고 내게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전업 작가가 됐다. 그럭저럭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둔 덕분이었다. 그러나 "제가 문학을 향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용기 있게…"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짜증 나는 직장 생활 함께 때려치우고 꿈을 좇자" 하는 얘기도 마찬가지. 그러면 결론이 뭐냐. 교훈이 뭐냐.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모르겠다'가 교훈인지도 모르겠다. 사표를 내기 전까지 잘못 살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사표를 내고 나서 잘못 살았다는 생각도 안 든다. 사표를 낸 과정은 급작스러웠다. 거기에 가지런한 인과관계는 없다. 평생 단점이라고 여겼던 울컥하는 기질이 나를 다음 단계로 밀어넣었다. 지금의 나는 사표 내기 전후의 나날과 사표를 낸 날에 대해, 내 단점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면서 감사한다. 우리는 미래를 전망하지 못하고 현재를 평가하지 못한다. 그러니 전망을 할 때도, 평가를 할 때도 겸허해져야 한다. 쉽게 들뜨거나 비관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인생 잘 모르겠다. 거기에 차분한 희망이 있다.

눈사태로 10명의 대원 잃어… 인생은 덤이다

이인정 '산악계 대부' 태인 회장


이인정 '산악계 대부' 태인 회장
실패라기보다는 최악의 경험이었다. 1969년 2월. 나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모든 것이 정지되는 느낌이다. 1970년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을 위한 훈련 등반이 설악산에서 있었다. 대원 18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훈련을 받았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야말로 열심히 악조건 속에서 훈련하다가 A조와 B조로 팀을 나눠 이동했는데,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보니 다른 조의 대원 10명이 엄청난 폭설에 의한 눈사태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하루 차이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한국 산악계 역사상 가장 큰 눈사태 사고였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각 분야에서 큰일을 했을 거라는 점이다. 나는 그 사고에서 생존해 평생을 한편으로는 죄인같이, 또 한편으로는 덤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눈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삶의 대부분은 산과 산사람, 산악계를 향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순간 차이로 운명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가급적 다른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을 많이 시도한 것 같다.

당시 월남전쟁에도 참여했는데, 먼저 월남에 간 산 친구들이 그곳에 등산 장비가 많다는 얘기에 혹해서 무조건 지원했다. 무시무시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겪으며 후회를 많이 하기도 했다. 등산 장비 때문에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면 아마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추억으로 얘기할 수 있지만 눈사태에서 생존하고, 전쟁에서도 생존해 현재를 살고 있다. 순간의 결정이 운명을 바꿀 수 있기에 판단에 신중을 기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日 진출 첫해 3군까지 추락… 기본 지키니 공이 살아나

선동열 야구인


선동열 야구인
야구가 정말 두려운 적이 있었다. 유니폼을 입으면서 '제발 경기에 안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까지 했다. 1996년 일본에 진출한 첫해였다.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을 때 언론에선 "한국 프로야구계의 보물이 왔다"며 흥분했고 구단은 특별 대우를 해줬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첫 등판부터 깨졌다. 히로시마와 치른 개막전에 처음 등판해 블론세이브를 범했다. 밸런스가 급속히 무너졌다. 2군으로, 다시 3군에 해당하는 '교육 리그'까지 내려갔다. 한 번도 겪지 못한 치욕이었다. 등에 꽂힌 태극기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해 부담감은 더욱 커갔다.

괴로워 당시 주니치에서 연수하고 있던 김성한(전 기아 감독) 선배와 술 한잔을 기울였는데 술집에서 나오는 사진이 가십성 주간지를 장식해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절치부심하고 있던 어느 날 재활군 투수 코치가 내게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스텝 앤드 스로(step and throw·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며 공을 던지는 훈련)입니다." 초등학교 때 외야로 공이 굴러오면 공을 잡아 홈 쪽으로 던지던 기본 자세다. 코치 말을 따라 걸음을 조절해가며 볼을 던져 봤다. 도무지 올라올 것 같지 않던 상하체 밸런스가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 사이 나는 기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국보 투수'라는 타이틀에 우쭐해 오만했다. 한마디로 건방졌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폼과 구위가 되살아났다. 이듬해인 1997년 38세이브를 올려 리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때의 처절한 추락은 내 인생에 값진 교훈을 남겼다. 운동에서도, 삶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기본을 지키는 것'임을.

할리우드 진출에 눈멀어 0.1초 만에 판권 계약

심형래 개그맨


심형래 개그맨
나만큼 낙폭 큰 인생도 없을 것이다. 1980~90년대 돈 잘 버는 연예인 1위에서 개인 파산까지 떨어졌으니.

돌이켜 보면 실수투성이 인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실수가 있었다. 2007년 영화 '디 워'의 비디오·DVD 판권을 400만달러에 미국 소니픽처스에 넘긴 일이다. 나중에 소니픽처스 관계자가 "역대 2차 판권 계약 가운데 투자 대비 수익을 많이 남긴 거래 중 하나로 꼽힌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론 내 땀을 헐값에 몽땅 넘긴 격이 됐다.

그때만 해도 내 관심은 할리우드 진출, 그 자체에만 있었다. '소니'가 어딘가. 성공 보증수표 같았다. 이름값만 믿고 꼼꼼히 따지지 않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사인하는 데 걸린 시간은 0.1초. 그 짧은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아니, 도끼처럼 내 인생을 찍어버렸다. 이후 서서히 재정적으로 어려워져 다시 일어서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

우리 인생은 작은 결정의 총합이다. 살다 보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결정적 순간이 몇 차례 온다. 그런데 이 순간은 영화에서처럼 드라마틱하게 펼쳐지지 않는다. 스치듯 지나친 순간이 나중에 보면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였을 때가 있다. 반대로, 순간의 결정 때문에 인생이 헝클어지기도 한다. 오랜 기간 누적된 실수보다 찰나의 판단 착오에 따른 실수가 더 많다.

판권 계약 이후, 선택 순간이 오면 경솔하게 굴지 않으려고 한다. 당장은 진눈깨비처럼 보이는 작은 결정이 언젠가 눈덩이가 돼 돌아올 수 있으니. 실수 없는 삶은 불가능하지만, 실수 적은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암으로 일상의 소중함 깨달아… 이젠 독박육아가 소망

윤지회 항암 웹툰 '사기병' 작가


윤지회 항암 웹툰 '사기병' 작가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 체력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몸은 회복이 더딘데 작가로서 커리어가 끊기면 안 되니 악착같이 일을 했다. 짜증을 달고 살았다. 야근이 일상인 남편 때문에 육아와 집안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왜 혼자 아등바등하며 '독박 육아'해야 하는 건가, 늘 마음 한편에 원망을 쌓고 살았다. 불만이 가득하니 아이에게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일에 전념할 수도 없었다.

악순환이 반복될 무렵 느닷없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위암 4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술과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육신의 고통이 정신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욕심 많고 불평하던 이전의 나는 사라져 버렸다.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세 살 아들은 시댁으로, 나는 병원에, 친정 엄마는 나를 간병하느라 부산 집을 떠나 서울에, 아빠는 혼자 부산에, 남편은 회사에….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불평불만 가득한 일상이 실은 너무나 감사해야 할 호사였다는 사실을. 내 인생 최고의 실수는 일상이 영원할 거라 착각했다는 점, 일과 육아의 틈바구니에 있을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몰랐다는 사실이다.

나의 일상은 암을 만나 한순간에 끊어져 버렸다. 아들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던 남편이 소중해졌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건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도 증오하던 독박 육아다. 내 자식 내가 데리고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싶다. 누군가에겐 힘들고 지치는 일일 테지만 지금의 나로선 꿈꾸기 어려운, 그래서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이다.

정치판 들어가 바꿔보려다 실패… 멀리서 봐야 보인다

남경필  '모두의 건강' 대표·전 경기도 지사

남경필  '모두의 건강' 대표·전 경기도 지사
남경필 '모두의 건강' 대표·전 경기도 지사
이미 여러 차례 밝혔지만 내 인생 최악의 실패는 정치 그 자체다. 물론 정치에 뛰어든 것 자체가 실패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를 바꾸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났다. 우리의 정치는 분명 잘못돼 있다. 원래 정치란 각자 다른 입장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서로 소통하며 접점을 찾는 행위다. 정치는 적수를 찾고, 그 적수를 쓰러뜨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적수와 함께 평화롭게 어울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기술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정확히 그 반대다.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여도 야도 마찬가지다. 그런 정치를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 후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운이 좋았다. 이전에는 정치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치판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청년들이 있었다. 국회에서 그렇게 머리 싸매고 싸워가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기발한 비즈니스 모델로 척척 해결하는 천재들이 거기 있었다. 그 청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꿔보려고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 실패를 인정하고 뒤늦게 새로운 업에 뛰어들었다. 몸으로 부딪치며 살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무언가 변화를 가져오려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정치를 바꾸겠다고 정치에 뛰어들면서 나 역시 기존 정치 문법에 물들어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한 발짝이 아니라 수십 발짝은 멀리 떨어져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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