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와 균형은 어디로… 공수처, 포청천의 '개작두 판타지'는 아닐까

조선일보
  • 노정태 철학 에세이스트
입력 2019.11.02 03:00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공수처 설치와 플라톤의 '국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일러스트= 안병현
필자의 유년 시절, 한 대만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판관 포청천'. 중국 북송 시대를 배경으로 수도인 개봉(開封·카이펑)에서 부윤으로 재직했던 포증(包拯)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포증은 송나라 수도의 행정을 총괄할 뿐 아니라 수사와 재판까지 지휘하는 엄청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그 힘으로 미제 사건을 해결하고 탐관오리를 척결한다. 어떤 범인은 자신이 귀족이라는 이유로 용 머리가 새겨진 용작두에 죽기를 원하나, 판관 포청천은 단호하게 외친다. "개작두를 대령하라!"

이런 이야기와 전개에 대중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정서는 현재 여론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공수처 설치를 주제로 한 최근의 어떤 여론조사에 따르면, 찬성 의견은 51%, 반대 의견은 41%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찬성 중 일부는 현 정부와 여당에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옹호하는 열성 지지층일 것이다. 하지만 공수처 법안을 밀어붙이는 세력의 위선과 도덕적 타락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현 정권의 대선 득표율보다 높은 비율의 국민이 공수처 설치에 찬성 의견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패와 비리 없는 사회를 향한 열망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정의를 향한 대중의 일반적 관념은 '판관 포청천'에서 극화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심상에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개작두 판타지'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백성 재산을 가로채고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오늘날 기준에서 보자면 독재에 가까운 초법적 수단을 동원해 단번에 척결하는 것 말이다.

철학적으로 논의를 승화시켜보자. '개작두 판타지'의 근간에는 결국 '각자에게 맞는 몫을 주는 것이 올바름이다'라는 원초적 정의 관념이 깔려 있다. 탐관오리는 그가 저지르는 죄악으로 개작두에서 목이 잘리는 게 합당하다. 반대로 그들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은 자신들이 일한 바에 따라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포청천은 탐관오리의 목을 치고 그의 재산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올바름이란 단순하고 명쾌한 것이다. 각자에게 그 각각에 맞는 몫을 주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 실현을 가로막는 '기득권층의 저항' 같은 것 때문에 현실 속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그 저항을 이겨내기 위해, 마치 포청천이 살던 북송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권력을 한 사람이나 기구에 몰아주자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올바름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플라톤의 대표작 '국가'를 펼쳐볼 때다. 특히 칼 포퍼가 씌워놓은 오명 탓에 사람들은 '국가'를 읽어보지도 않고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나쁜 책인 양 몰아붙이기 일쑤다. 하지만 '국가'는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그 주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고전이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그가 남긴 최후 작품 '법률'을 제외하고 나면, 플라톤이 남긴 대화 편은 언제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1권 초입에서 50대의 중년 소크라테스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 케팔로스와 가벼운 논쟁을 벌인다. 케팔로스는 올바름이란 남에게 무언가를 빌렸다면 제때 갚는 등,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각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작두 판타지'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근간에 깔려 있는 원초적 정의 관념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에 반박하기 위해 한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책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멀쩡했을 때의 친구한테서 무기를 맡았다가, 후에 그 친구가 미친 상태로 와서 그것을 돌려주기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순순히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성을 잃고 광분한 상태로 무기 주인이 찾아와 맡겨둔 무기를 돌려달라고 할 때, 그가 주인이라 해도 무기를 돌려주면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올바름의 문제는 단순하지도 명백하지도 않다. 주인에게는 자기 물건을 찾아갈 권리가 있다는 하나의 올바름과, 누군가 남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방관하거나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올바름이 팽팽하게 충돌하고 있다.

공수처에 대해서도 같은 각도에서 짚어볼 수 있다. 집권 여당과 청와대는 자신들에게 전례 없고 견제받지 않는 힘을 주어야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얼마 전 조국 전 장관 사태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났다시피, 검찰에 의지가 있다면 성역 없는 수사는 지금도 가능하다. 게다가 청와대와 집권 여당은 불과 몇 달 전 야권의 반대를 묵살하고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실제로 성역 없는 수사가 시작되자 윤석열을 검찰 기득권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런 모습이 이성을 상실한 채 무기를 내놓으라는 저 가상의 아테네인과 대체 뭐가 다른가. 하물며 수사권과 기소권은 국민 것이지 청와대나 여당이 맡겨둔 물건도 아닌데 말이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장관에 임명된 후 한 달 만에 가족이 연루된 온갖 비리 혐의로 옷을 벗는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더 큰 몽둥이를 쥐여주자는 주장에 설득력이 생길 리 만무하다. 올바름의 문제는 '개작두 판타지'처럼 단순하지 않다. 공수처를 만들고 수사권과 기소권을 몰아주면 올바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인 양 말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 혹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는 21세기 대한민국은 고사하고 기원전 300년경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설득하지 못한다.

'국가'의 1권은 플라톤이 젊은 시절 쓴 이른바 '전기 대화 편'에 속하는 작품으로, 올바름에 대한 사람들의 통상적 편견을 드러내고 깨부순다. 그리고 2권부터 10권까지 이어지는 긴 논의를 통해, 상상 속의 이상 국가를 건설하며 올바름의 진정한 의미와 그 구현 방식을 모색해 나간다. 결국 인류는 몽테스키외, 존 로크 등 선각자를 통해 견제와 균형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원리를 발견했다. 그것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과연 지금, '열린 사회의 적'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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