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노벨상 수상자야"

입력 2019.10.28 03:15

피로연서도 배웠던 포겔… 겸손의 서약 하이에크
시인처럼 상상하고 과학자처럼 검증해야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정치적 논란이 일상이 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한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는 결국 시민을 평범한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능력. 추문과 소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믿는다. 공교롭게도 노벨 경제학상과 관련한 세 가지 에피소드다.

10월의 마지막 별인 경제학상 발표를 끝으로 2019년 노벨상 수상자가 모두 호명됐을 때 단톡방 하나가 울었다. '이번 경제학상 수상자 크레이머 교수는 오링(O-ring) 이론으로 유명하잖아요, 형님.'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기업에서 일하는 후배였다. 오링은 1986년 미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 폭발했을 때 원인으로 지목된 고무링. 금속과 금속 사이를 밀폐시키는 간단한 부품인데, 온도가 낮아지면 효과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소위 최첨단 기술의 집적체라는 나사(NASA) 연구원들이 간과했다. 마이클 크레이머는 이에 착안했다. 요약하면 높은 수준의 기술 집약적 노동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낮은 수준 노동이 결합되면 전체가 다 망한다, 그러므로 같은 수준의 '인재 풀' 형성이 중요하다는 경제학적 주장이었다.

오링 이론에 대한 사전적 설명이 이 글의 목적은 물론 아니다. 방점은 한 분야의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른 분야에도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어떤 태도'에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공부도 놓지 않는 후배는 이 이론을 뒤집으면 기업의 두뇌 유출(brain drain)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좀 더 발랄하게 확장하면 류현진과 손흥민의 사례도 마찬가지라는데, 나는 이 공학도의 타 분야에 대한 열정이 더 아름다웠다.

두 번째 사례.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한 영국 작가가 어느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 피로연에서 옆 좌석 하객과 대화하다 화제가 미국의 보건 의료로 이어졌다고 한다. 한참 얘기 나누고 헤어진 뒤 신부 동생이 작가에게 물었다. "그 사람 얘기해보니 어때?" "바보는 아닌 것 같던데?" 신부 동생은 경악했다. "뭔 소리야, 그분 노벨상 수상자야." 멍해진 작가가 물었다. "전공은 뭐야?" "미국의 의료 서비스." 작가는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썼다. '고백하건대, 정말 그 사람은 내 말도 안 되는 수다를 훨씬 더 열심히 들으며 배우는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포겔(1926~2013). 199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마지막으로 1974년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 그해 시상식 수락 연설에서 이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 경제학자는 '겸손의 서약'을 했다.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우리는 지극히 좁은 분야의 전문가에 불과하며, 만물박사처럼 떠드는 것은 금물이라는 겸손이자 맹세였다.

앞에서 '아름다운 정신'(Beautiful Mind)이라고 했다. 지난 주말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에서 이 정신의 공통점을 읽었다. 소문이나 가짜 뉴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시인 같은 상상력을 지니되 과학자처럼 데이터로 검증하며, 이미 한 분야 전문가라도 끊임없이 다른 분야를 배우려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며,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는 것.

기자 생활 25년 동안 반복해서 깨닫는 게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 또 하나 있다. 하지만 그들도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멈춰 있더라는 것. 새로 알게 된 사실과 겸손이 비록 한 뼘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최소한 그만큼은 달라져 있다. '아름다운 정신'으로 시작하는 월요일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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