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실에서 체제 붕괴를 감지했던 소련 젊은이들

조선일보
입력 2019.10.19 03:00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알렉세이 유르착 지음김수환 옮김|문학과지성사
640쪽|3만2000원

1970~1980년대 소련 젊은이들 사이에서 보일러실 기술자와 창고 경비, 거리 미화원 등이 인기 직종으로 떠올랐다. 공통점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야간 근무를 할 때만 바빴다. 교대 사이에 휴식 시간도 많았다. 심지어 집회와 행진 같은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됐다. 봉급은 낮았지만 남는 시간에 이들은 실존주의 철학과 불교에 심취하거나 아마추어 록 밴드를 결성했다. '보일러실 로커(rocker)'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196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현재 미국 버클리대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도 라디오와 테이프로 서양 음악을 접했던 당시 소련의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전파물리학을 전공한 뒤 연구원으로 근무했지만, 1987년에는 아예 펑크록 밴드 매니저로 나섰다. 소련 해체 직전인 1990년 미국 유학을 떠났던 그가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라고 하는 동시대인들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인류학의 생생한 현장 기술과 '초규범화' 같은 까다로운 철학적 용어가 연신 교차한다. 덜컥 겁먹기 쉽다. 하지만 서론과 결론에 지뢰처럼 깔려 있는 난해한 개념만 피하면 붕괴 직전의 소련을 이해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언제나 이미 체제 붕괴에 대비해왔으며, 사회주의 체제하의 삶이 흥미로운 역설들 가운데 형성됐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장의 고백을 읽고 있으면, 시적(詩的)이면서도 알쏭달쏭한 책 제목도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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