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 사명대사가 일본 교토에서 쓴 시. 고려 말 문신 유숙의 시 ‘벽란도’에서 운을 빌려 짓고 친필로 썼다.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래되지만(有約江湖晩)/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紅塵已十年)/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白鷗如有意)/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故故近樓前)."

임진왜란 발발 12년이 지난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 담판을 벌이던 사명대사 유정(惟政·1544~1610)은 교토에 머물며 이런 시를 지었다. 일본에서 강화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고려 말 문신 유숙(1324~1368)의 시 '벽란도'를 차운(次韻)해 짓고 친필로 직접 써 내려갔다.

사명대사 친필 글씨 5점이 400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서 공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임진왜란 후 강화 및 포로 협상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약했던 사명대사가 교토의 절 고쇼지(興聖寺)에 남긴 유묵(遺墨·생전에 제작한 글씨나 그림)을 빌려 와 15일부터 다음 달 17일까지 전시한다고 밝혔다. 고쇼지가 소장한 사명대사 글씨 5점과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1559~1619)이 쓴 글씨 1점,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한 사명대사 초상화까지 7점을 특별 공개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려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의 평화를 이끌어내고자 노력한 외교승이었다. 대사가 외교사절로 일본에 가게 되자 당시 조선 민가에선 이런 노래가 퍼졌다. '조정에 삼(三)원로가 있다 말 마오/ 사직과 백성의 안위가 오로지 한 스님에게 달렸는걸.' 이수광은 송별시로 '난세에 이름난 장수 많건만, 기이한 공로는 늙은 스님 한 분뿐이네'라고 했다. 사명대사는 일본 막부의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으면서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성과를 거뒀다. 박물관은 "전후(戰後) 조선과 일본 사이의 평화를 끌어내고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 뜻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라고 했다. 신라의 문장가인 최치원의 시 두 구절을 써 내려간 유묵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