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글로벌리즘에 종언?...국제화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

입력 2019.10.13 09:09 | 수정 2019.10.13 10:5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4일(현지 시각) 유엔총회에서 "글로벌리즘이라는 종교는 과거 미국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이익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다"며 "그런 시절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미국 우선주의'와 같은 맥락인 국가주의·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세계 각국의 고립주의와 자국 우선주의 분위기가 더 팽배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국가기후환경회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국가기후환경회의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 국가기후환경회의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반기문(75)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 같은 상황 변화를 걱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가 인권 수호의 기치 아래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근간이 다자주의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국제화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며 어느 나라보다도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투자도 많이 하지만 잘 쓰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반 총장은 지난 4월 출범한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을 맡아 미세먼지 문제 해결에 힘을 쏟고 있다. 국가기후환경회의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다. 초대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요청에 반 전 총장이 미세먼지 문제 해결이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 기회’라는 각오로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유엔 사무총장 임기(2007년~2016년)를 마친지 3년이 되어가지만, 반 전 총장의 무대는 여전히 ‘전지구(全地球)’다. 지난해에만 58개 국가와 지역을 누볐다. 맡고 있는 직책이 20개를 헤아리고, 하루 한두 번은 어디선가 연설이나 강연을 할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유엔 사무총장으로 느낀 영어와 글로벌 마인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요청에 선뜻 응했다.

세계 최고 강대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화(글로벌리즘·globalism)를 배격하고 애국주의(patriotism)를 따를 것이라는 의지를 지난해와 올해 유엔 연설에서 거듭 천명했다. 영어와 글로벌 마인드의 중요성에는 변화가 없을까.
"다자주의가 위협 받고 있는 건 전직 유엔 사무총장으로 걱정스럽긴 하다. 다자주의는 2차대전 이후 이 세상을 평안하게 발전시키고 인권을 수호해온 근간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도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나라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만 생각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하지만 길게 보면 국제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국제 공용어로서 영어의 위상에도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라는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영어라는 언어를 매개로 세계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더 의미가 있다."

유엔의 공식 언어(official language)는 6개(영어, 불어, 중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다. 영어 외에 불어도 많이 쓰이지 않나. 사용자 수로 보면 중국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통령 시절(2007년~2012년) 내가 유엔 사무총장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임기 중 공식 석상에서 영어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퇴임 후에도 교류를 이어왔는데 언젠가 관저에서 만나 불어로 대화를 하려고 했더니 대뜸 "영어로 이야기를 하자"고 하더라. "영어를 못 하면 안 될 것 같아 요즘 배우고 있다"고 했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총리가 그럴 정도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전 스페인 총리(2004년~2011년 재임)와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중국어는 모국어 사용 인구만 14억에 달하지만 아직 ‘글로벌 언어’는 아니다."

부족한 영어 실력을 통역으로 커버하긴 어려운건가.
"중요한 회담이나 미팅의 경우 상대방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데도 일부러 통역을 두는 경우가 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하지만 통역이 커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상회담 때 포토세션이 대표적인 예다. 정상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5~10분 동안은 통역은 함께 할 수 없다. 영어(외국어) 실력에 따라 이 시간 동안 유익한 대화가 오갈 수도 있고, 견디기 힘든 어색한 시간으로 흘러보낼 수도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우문(愚問)이지만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 영어를 무지하게 잘 하는 건 아니다. 영어를 전공하거나 요즘 학생들처럼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다. 다만 직업이 직업(?)이라 남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하는 건 곧잘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종류의 영어를 접하다 보니 지금도 눈 감고 말만 들어도 어느 나라 사람이 하는 영어인지 맞출 수 있다. 사무총장 재직 시절 1년에 지구를 12바퀴 씩 돌았으니까. 그래도 생활영어는 아내(유순택 여사)가 나보다 낫다(웃음).

한국인의 고질적인 ‘영어 울렁증'의 원인은.
"대한민국 경제력과 국제 위상,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공부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영어가 많이 쓰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틀려도 좋으니 우선 영어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미국 대학생에게 영문법 물어보면 얼마나 잘 알겠나. 주어, 목적어, 보어... 그런거 너무 따지다가 우리나라가 (영어와 국제감각이) 뒤쳐지게 된 거다. 해부만 하다 망했다."

국제공인영어시험 '아이엘츠(IELTS)'를 주관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2017 전세계 아이엘츠 성적 분석' 결과를 보면, 한국은 주요 40개 국가 중 '아카데믹' 30위, '제너럴' 38위를 기록했다. 아이엘츠는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아카데믹), 이민·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제너럴)이 주로 응시한다. 토익·토플보다 높은 수준의 실전 영어 능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고쳐야 할까.
"단어를 많이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정확한 뜻과 발음을 숙지해야 한다. 나는 중학교 시절 영어를 공부할 때 같은 단어들 20~30번씩 써가며 외웠다. 머릿속으로 그 단어들을 활용해 이야기 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영어로 된 글을 반복해 읽는 것도 좋지만,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연습도 해야 한다. 부단한 연습이 필요하다."

조기교육이란 말도 없던 시절에 대도시도 아닌 시골(반 전 총장의 고향은 충북 음성이다)에서 어떻게 영어에 눈을 떴나.
"충주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근처에 큰 비료공장이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영국인 기술자들과 부인들을 찾아다니며 영어를 익혔다. 2년 선배인 안영수 국제영어대학원대학(IGSE) 총장도 함께 영어를 배우러 다녔다. 그 시절 부터 리더십이 대단했던 양반이다. 학생회장도 했고. 난 공부하려고 학생회장을 안 했다(웃음).

경희대 영문과 교수와 국제교육원 원장을 지낸 안 총장과는 고향 선후배로서 변함 없는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반 총장은 지난 8일 안 총장의 부탁으로 서울 강동구 성내동에 있는 IGSE에서 개교 17주년 기념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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