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도서관 방화범 추적하며 새로 지은 '기억의 도서관'

조선일보
입력 2019.10.12 03:00

1986년 LA도서관서 발생한 화재… 불타고 훼손된 책이 110만권
용의자 가족·사서·소방관 인터뷰… 당시 상황과 복원 과정 재구성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지음|박우정 옮김|글항아리

"불은 처음에 까만 술이 달린 오렌지색 가장자리 장식처럼 보였다. 그러다 순식간에 확 번져 페이지가 눈앞에서 사라졌고―거의 바로 다 타버렸다―책 한 권을 단 몇 초 만에 집어삼켰다. 어찌나 빠른지 책이 폭발해버린 것 같았다."

바람 불지 않는 날을 골라 저자는 로스앤젤레스의 집 뒤 언덕에 오른다. 성냥을 그어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 '화씨 451'에 불을 붙인다. 애서가인 저자에게 책을 훼손한다는 것은 몹시 버거운 일이었지만,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방화범의 심리를 이해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어댑테이션'의 원작 논픽션 '난초 도둑'으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수전 올리언은 이 책에서 1986년 4월 29일 발생해 7시간 38분만에 진압된 LA 공공도서관 화재 사건을 추적한다. 사망자는 없었으나 40만권 책을 한 줌 재로 남기고, 70만권을 훼손한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공공도서관이 입은 최대 손실로 기록됐다. 조사 당국은 방화로 추정하고 27세 청년 해리 피크를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되었다. 도서관은 1993년 재건축되었고, 화재 원인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았다.

2011년 뉴욕에서 LA로 이사한 저자는 아들의 학교 과제 때문에 도서관 사서를 만나러 갔다가 30년 전 화재 사건을 주제로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웬만한 책은 사 보며, 길들여진 도서관 책 내음보다는 새 종이와 잉크의 싸한 냄새를 사랑하는 저자에게 그 도서관이 어린 날 어머니와 책을 빌리러 가던 추억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네갈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예의 있게 표현할 때 그 혹은 그녀의 도서관이 불탔다고 말한다. (…) 각 개인의 의식은 스스로 분류하여 내면에 저장한 기억들의 컬렉션, 한 사람이 살아낸 삶의 개인 도서관이다. 우리가 죽으면 불타 사라지는 무엇이다. 하지만 그 내면의 컬렉션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의 페이지나 낭송되는 이야기로 한 사람 혹은 더 큰 세상과 공유할 수 있다면 당신의 가슴속에 있던 그 무언가는 생명을 얻게 된다."(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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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9일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화재 피해 조사를 하고 있는 소방대장 돈 스터키. 5월 1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실린 사진이다. /글항아리
저자는 4년 넘게 매달리며 LA도서관과 관련된 수많은 인물을 인터뷰한다. 화재 발생 7년 후 세상을 뜬 용의자 해리 피크의 가족, 사건 당시 사서들, 진압 작전에 투입된 소방관 등을 만나 도서관의 역사, 화재 상황, 복원 과정 등을 재구성한다. 방화 사건을 추적하지만 긴박감은 없다. 이야기는 사변적이며 시시콜콜하다. 1873년 1월 도서관이 개관했을 때 여자들은 회원 가입이 되지 않았고 이후 선별된 잡지를 구비해 놓은 '숙녀용 열람실'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소장품 중 대량의 식당 메뉴판이 있는데 안과 의사인 기증자가 뒷면에 같이 식사한 여성과의 데이트 일기를 써놓았다는 것, 화재 진압 때 물에 젖은 70만권의 책은 냉동고로 옮겨졌고 2년 후 해동, 건조, 소독해 다시 제본했다는 것…. 딱히 유명한 곳도 아닌 LA도서관에 대한 이 잡다한 이야기들은 그러나 흥미롭게 읽힌다. 책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애정이 독자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해리 피크는 과연 방화범이었을까? 추적을 계속할수록 저자는 확신하지 못한다. 조사 당국이 화재 원인을 방화로 규정하고, 합선 등 다른 원인을 배제한 채 '짜맞추기식 수사'를 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명확한 결론으로 책을 마무리 짓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결심하며, 저자는 폐관 시간 직전의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은 고독을 누그러뜨리기에 좋은 곳이다. 완전히 혼자일 때도 수만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대화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 책장에서 책을 뽑아보지 않아도 그 안에서 말을 걸기 위해 기다리는 목소리가 있고, 말을 하면 누군가 들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곳이니까. "나를 늘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런 확신이었다. 가장 이상하고 특이한 책도 그런 무모한 용기, 자신의 책이 읽혀야 할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을 품고 쓰였다. 나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어리석고 용감한지, 그리고 얼마나 필요한지, 이런 책들과 원고를 모으고 보존하는 것 또한 얼마나 희망으로 가득 찬 일인지에 감동 받았다."(377쪽) 원제 The Library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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