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외교 발표문의 조미료 냄새

입력 2019.10.12 03:14

노석조 정치부 기자
노석조 정치부 기자
글은 음식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셰프가 양파·소고기 같은 각종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하듯 글을 쓰는 사람은 여러 팩트를 한데 모아 한 편의 글을 쓴다. 막 발생한 사건 기사는 갓 잡은 생선회 같다. 속보 기사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너무나 소름 끼치는' 같은 수식 어구가 필요 없듯 싱싱한 날 생선회는 후추를 치거나 불에 구워 먹을 필요가 없다. 재료가 좋으면 그 본연의 맛을 가감 없이 느끼는 게 낫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류의 글이 있지만, 정부가 발표하는 성명이나 보도자료만큼 기름기 쫙 빠진 무미건조한 글도 없다. 너무 딱딱해 수면제가 따로 없을 정도다. 정부의 입장은 어느 한 정부 관계자의 사견이나 특정 정치 세력의 편향된 주장이어선 안 되고 그렇게 비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문제가 아닌 다른 나라를 상대하는 외교 당국의 대외 발표 자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요즘 외교부 발표문에선 화학조미료를 팍팍 친 냄새가 진동한다. 지난 7일엔 "한·미 협상팀 간에는 이번 협상 전후로 '시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밀히 협의해 왔다"는 내용이 포함된 세 문장의 입장문을 기자단에 배포했다. 지난 5일 미·북 실무협상이 정부의 기대와 달리 '노 딜(결렬)'로 끝나면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려 하자 이날 오전 서둘러 내놓은 것이다. 적지 않은 기자들이 '시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밀히 협의했다'는 외교부의 창의적인(?) 표현에 쓴웃음을 지었다. '긴밀히 협의했다'고만 해도 충분했다.

외교부는 지난 8월 29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파기 결정'으로 한·미 동맹 균열이 우려된다는 여러 전문가와 언론 지적에 대해 "억측이고 지나친 비약"이라는 반박 보도자료를 냈다. 정부의 정책 결정에 대해 우려하는 서울과 워싱턴의 적지 않은 외교·안보 전문가 의견에 대해 그냥 비약도 아니고 '지나친' 비약이라고까지 깎아내린 것이다. 당시 외교가에선 "외교부가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하느냐"는 말이 나왔다. 또 지난달 27일 정부 관계자는 서울에서 외신 간담회를 열고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양측이 대북 관계의 '전환(transform)'을 강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전환'은 '처음'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숱하게 쓰인 표현이었다. '원조'가 아닌데도 '원조'를 내세우는 요식업자를 연상케 했다.

길거리 정크 푸드엔 양념이 많이 들어간다. 벌겋고 진득한 양념이 음식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원 식재료가 좋지 않기 때문에 혓바닥을 얼얼하게 할 정도로 진한 양념으로 맛을 위장하는 것이다. 담백해야 할 정부의 발표문에 이런 '위장 양념' 같은 과한 수식 어구가 요즘 너무 많다. 알맹이가 변변찮아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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