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민주정이 타락한 형태로 진입했다

입력 2019.10.11 03:15

'인륜' 내세워 公務 무력화, 집안일이 나랏일에 앞서
민주정이 타락하면 衆愚政… 궤변·선동이 한계 넘었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이한수 문화부 차장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사상사에 기여한 업적은 어떤 정치체제(정체)든 '타락한 형태'가 있다고 갈파한 점이다. 군주정은 폭군정, 귀족정은 과두정, 민주정은 중우정이라는 타락한 형태가 있다고 했다. 1인 지배 정체(군주정)라도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건강한 형태가 있는 반면, 다수 지배 정체(민주정)라도 지배집단 이익에만 기여하는 타락한 형태가 있다고 2300년 전 간파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촛불의 명령'으로 현 정부가 출범하고 대통령이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예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건강한 민주정이 실현될 것이란 기대가 적지 않았다. 대통령과 비서진이 흰 셔츠 차림으로 일회용 커피 컵을 들고 활짝 웃으며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사진이 언론을 장식했을 때 흐뭇하게 바라본 국민도 많았을 것이다.

임기가 겨우 절반쯤 지난 지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던 취임 연설은 정치·경제·외교·안보 모든 면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국가와 공공의 이익은 제쳐놓고 제 편 이익에만 집착하는 타락한 형태로 말이다. 정권 핵심 인사와 극렬 지지자들의 위선과 궤변, 요설과 선동은 이미 정상 범위를 넘어섰다. "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라고 했던 초심(初心)은 휴지 조각이 됐다. 법이 정한 절차는 유명무실 나락으로 떨어졌다. 데마고그(선동가)가 이미 선동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군중(극렬 지지자)을 동원해 지배집단이 법 위에서 전횡하는 정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타락의 끝판인 '극단적 중우정'이라 했다.

조선 망국도 '타락' 때문이었다. 망국 책임을 흔히 지배세력 노론에 돌리지만, 노론도 원래는 폭정에 저항했던 운동권 사림(士林)의 후예였다. 후배들이 타락했다 해서 선배 사림까지 폄훼할 수는 없다. 망국은 성리학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그러나 600년 전 조선 건국 당시 성리학은 새로운 세상을 이끄는 혁명적 이념이었다. 정도전은 군주정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군주의 전횡을 제한해 인륜(人倫)이 살아 숨 쉬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백성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세종 시대의 '여민락(與民樂)'은 폭정을 제어하는 위대한 정치 이념이었다.

망국은 사림 정치가 타락한 형태가 되면서 다가왔다. 그들은 인륜을 내세워 국가를 약화시켰다. 현종 4년(1663년) 수찬 김만균은 인륜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공무 수행을 거부했다. 병자호란 때 할머니가 청나라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원수의 나라 사신을 맞이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라며 제 편을 옹호했다. 인륜이라는 보편 이념을 내세워 집안일을 나랏일보다 앞세우는 타락한 형태를 지속하면서 조선은 결국 국망(國亡)을 맞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단지 민주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란 사실은 제헌헌법 설계자들이 민주정의 타락을 경계했던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우정을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부른 점이 의미심장하다. 건강한 민주정은 '폴리티'(polity)라 했다. 다수 지배가 국가와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는 민주공화정이야말로 폴리티의 모습일 것이다. 법무장관이 자택을 압수수색(공무) 하는 검사와 통화한 사실을 두고 "아내의 건강을 배려"한 "인륜의 문제"라 하고, 대통령이 이에 대해 "인권"을 말하며 제 편을 옹호했을 때 우리 민주정은 타락한 형태로 진입했다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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