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와 툇마루 품은 10층 빌딩, 햇살과 바람도 놀다가네

조선일보
입력 2019.10.10 03:00

[디어스 타워]
경기 안양의 페인트 회사 사옥… 올해 건축가協 '베스트7' 수상
바깥 경치 끌어들이는 실내 정원, 처마처럼 빛 가려주는 발코니 등 한옥의 공간을 현대적으로 구현

한옥의 문법을 콘크리트 빌딩으로 구현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경기 안양시 관양동 '디어스(deer's) 타워'는 하나의 단서가 될 만한 건축물이다. 지난해 페인트 도장(塗裝)설비 회사의 사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한옥의 툇마루 비슷하게 안팎에 완충지대를 두고, 바깥 경치를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공간도 큼직큼직하게 마련했다. 관념적 전통지상주의는 아니다. 햇빛을 가려 줄 루버(널빤지를 빗대는 창 가리개)를 설치하면서 태양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계산해 최적의 위치와 각도를 찾아냈다. 그 결과, 도심의 여느 빌딩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형태가 나왔다.

건축가 한만원(63·HNSA건축사사무소 대표)이 설계했다. 최근 이곳에서 만난 한 대표는 "땅이 가진 특징과 조응할 때 강력한 공간이 나온다"며 "테헤란로였다면 이런 디자인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강남 테헤란로로 대표되는 빌딩 숲과 달리 이곳은 진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관악산 줄기가 근처까지 내려오고 수리산·청계산·백운산이 멀리 보인다. 도심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을 적극 받아들일 장치를 마련하는 게 디자인의 출발점이었다는 이야기다.

사진1~3
①테라스와 발코니, 루버(창가리개)가 입체적인 표정을 만들어내는 디어스 빌딩. 처마나 툇마루 같은 한옥의 공간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디자인했다. ②바깥 경치를 끌어들이기 위한 실내 정원. ③파울 클레의 그림에서 색상을 추출해 화사하게 꾸민 계단실. /사진가 김용순·사진가 박영채
우선 실내 정원(아트리움)을 만들었다. ㅁ자 건물 가운데에 두는 폐쇄적 중정(中庭)과 달리 전면(前面)에 배치했다. 10층짜리 건물에서 1~2층의 로비는 빼고, 2개 층마다 하나씩 4개의 정원이 건물 가운데를 차지했다. 두 층을 터서 천장 높은 이 공간에 들어서면 일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한 대표는 "여름엔 차양 효과, 겨울엔 온실 효과로 실내 온도 조절을 돕는 장치이기도 하다"고 했다.

한옥의 툇마루 같은 발코니와 테라스가 있다. 아파트 베란다처럼 사무실에서 바로 발코니로 나올 수 있다. 건물 귀퉁이에는 역시 2개씩 층을 터서 발코니보다 널찍한 테라스를 만들었다. "유리창으로 막힌 공간과 문 열고 나올 수 있는 공간은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일하다가 잠시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도 쐬고, 녹지를 가까이서 느끼도록 숨통을 터 주고 싶었습니다."

건물 외벽 밖으로 내민 발코니는 한옥의 처마처럼 햇빛을 가려주는 역할도 한다. 한 대표는 "처마는 수직 방향의 빛을 가리기에 적합한 방식"이라며 "늦은 오후 건물 깊숙이 들어오는 햇빛을 막기 위해 루버를 덧댔다"고 했다. 루버는 공격수의 길목을 가로막는 노련한 수비수처럼 적재적소에, 햇빛 들어오는 방향을 향해 설치돼 있다. 이 위치와 각도를 찾기 위해 날짜별·시간대별 태양의 고도, 방위각, 기온, 일출·일몰 시각을 분석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해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저런 데이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인데 설계에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색(色)을 다루는 회사답게 실내는 다채롭다. 지하까지 총 12개 층을 각각 열두 달의 탄생석 색상으로 칠했다. 어두컴컴하기 마련인 계단실에도 여러 색상을 적용했다. 한 대표는 "파울 클레의 '태고의 소리(Ancient Sound)'라는 그림에서 색상을 추출했다"며 "그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범종이 울릴 때와 비슷한 음향의 떨림이 느껴지는데 그걸 구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거참 멋있네." 막바지 공사 때 트럭을 몰고 왔던 운전사들이 이렇게 감탄한 적이 있었다. 한 대표는 "건축 전문가가 아닌 이들의 솔직한 비평이어서 반갑고 고마웠다"고 했다. 근처를 지나던 건축과 대학생이 드론을 띄워 찍은 건물 사진을 사무실로 보내오기도 했다. 지난달 한국건축가협회가 매년 완성도 높은 건축물 7곳을 선정하는 '베스트 7'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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