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빠지면 끝장이다

조선일보
입력 2019.10.10 03:14

마라톤, 출발부터 골인까지 포기할까 고민… 완주 그 자체가 성취
앞서 뛰던 사람 초코파이 반쯤 먹다 버려… '아! 차라리 날 주지'
'춘마' 때 풍경 감상은 딱 1분, 앞 사람 발꿈치 보며 죽어라 뛸 뿐

한현우 논설위원
한현우 논설위원
안철수씨가 달리기에 관한 책을 냈다고 해서 읽었다. 전 독일 부총리였던 요슈카 피셔의 책 '나는 달린다'를 읽고 나서 달리기를 시작했고 풀코스 마라톤까지 완주했다고 해서 흥미가 일었다. 나 역시 예전에 피셔의 책을 읽고 달리기를 시작해 풀코스 마라톤을 네 번 완주한 경험이 있다.

안씨는 작년부터 여러 차례 10㎞와 하프코스를 뛰었고 올해 첫 풀코스를 완주했는데 그 기록이 3시간46분14초라고 했다. 실로 대단하고 엄청난 성취다. 케냐 선수와 나이지리아 선수가 1·2위를 다투는 마라톤을 떠올리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첫 풀코스에서 '서브 포(sub 4·네 시간 이내 완주)'를 해냈다는 건 30년가량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식당 차린 첫해에 미쉐린 스타를 받은 것과 비슷하다.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대뜸 기록부터 묻는다. 나의 첫 풀코스 기록은 4시간28분이었는데 열에 아홉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마추어 마라톤의 가장 큰 성취는 완주이며, 기록은 그다음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첫 완주 때 아버지는 "너 참 장하고도 독하다"고 말씀했는데 나는 그 표현이 모든 마라톤 완주자를 정확히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안철수씨도 장하고 독한 사람인 것 같다.

아마도 안씨의 마라톤은 어떤 좌절감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달리기는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마라톤 완주에는 훨씬 더 큰 동기가 필요하다. 아마추어 마라토너 중에 암 환자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많은 이유다. 어찌해볼 수 없는 좌절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려는 강렬한 욕구가 사람을 마라톤으로 이끈다. 돈·학벌·사회적 지위 다 소용없다. 오로지 맨몸뚱이를 단련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 중 하나가 마라톤 완주다.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빠지면 끝장이다
/일러스트=이철원
좌절은 인간 내면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감정이다. 피셔 역시 이혼과 정치적 실패가 겹친 데다가 너무 뚱뚱해져 축구를 잘할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한 뒤 달리기에 입문했다. 초선 의원 시절 그는 청바지를 입고 등원할 만큼 패기 넘치던 젊은이였다. 중견 정치인이 된 뒤로는 스트레스를 와인과 음식으로 풀었다. 술에 취해 스트레스를 잊고 나면 다시 좌절이 찾아왔다. 그는 날씬해지려고 달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패기를 되찾고 싶어 달렸다.

10월 말에 열리는 춘천마라톤은 춘천 의암호를 한 바퀴 도는 아름다운 코스로 유명하다. "춘마에서 아름다운 춘천의 가을을 만끽하라"고들 하지만 내가 춘마를 완주하면서 가을 풍경을 본 시간은 다 합쳐도 1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보며 거리가 벌어지지 않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할 뿐이다. 마라톤을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한 장면은 앞서 뛰던 어떤 사람이 반쯤 먹은 초코파이를 길가에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걸 버리다니! 차라리 나를 주지, 하고 속으로 외쳤었다. 첫 완주 때 나는 30대 초반이었는데 무수한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참가자가 나를 추월해 갔다. 달리기가 좋아서 마라톤을 하는 게 아니다. 달리고 난 뒤의 환희를 맛보려면 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마라톤을 준비하는 동안 매일 10㎞를 뛰고 주말이면 20~30㎞씩 뛰었으나 40㎞ 넘게 달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지다. 20㎞ 중반부터 몸의 온 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고 30㎞가 넘으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을 몽둥이로 맞는 느낌이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아픈데 어떤 구간에서는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저절로 달려진다고들 말하는데 그게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즉 달리기의 무아지경 아닐까 한다. 마라톤은 출발부터 골인까지 오로지 고통과 후회로 가득 차 포기할까 말까 번민하는 스포츠다. 그것을 이겨내야 완주할 수 있기에 완주 자체를 성취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 제약 회사 임원이 쓴 '달리기의 폐해'라는 에세이가 있다. 그는 '폐해'라는 말로 달리기의 중독성을 예찬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달리기를 하면 아무리 먹어도 살이 계속 빠진다. 얼굴도 새카매지니 어머니는 애꿎은 며느리 탓을 한다. 비 오는 날 달리면 미친 사람 취급도 받는다. 정장을 모두 새로 사야 하고 신발장엔 운동화가 가득 찬다. 화장실의 느긋한 즐거움도 사라진다. 모든 게 4초면 끝난다. 이런 폐해를 알고도 달리기를 한다면 모두 당신 책임이다. 빠지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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