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그냥 읊으면 경제가 돌아가는가

입력 2019.10.10 03:13

대통령 투자 펀드엔 농협 직원 1/3… 신산업 30%, 일류기업 1200개
정부 발표, 초등생 도표 숙제 같아… 쇼·영혼 없는 숫자·남 탓만 남아

김덕한 산업1부장
김덕한 산업1부장
지난 8월 말 문재인 대통령이 투자한 '필승코리아 펀드' 가입자의 3분의 1이 판매 회사인 농협은행 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펀드에 판매사 직원들이라고 가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필승코리아'라고 쓰인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술 독립'이라는 메시지를 던졌음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한 것은 이 펀드를 만들고 대통령이 투자한 행위가 결국은 '쇼'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벤트를 통해 국민적 열의를 모아가는 건 탓할 일이 아니지만 '쇼'보다 강한 메시지가 없다면 그건 그냥 '쇼'일 수밖에 없다.

국가 경제정책은 당장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제의 비전을 제시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영혼이라곤 하나도 찾아보기 어려운 숫자들로 가득 차 있다. 지난달 11일 산업통상자원부는 경제활력대책회의를 열고, 동남아시아·인도 등 신남방지역과 러시아·몽골·중앙아시아 등 신북방지역의 수출 비중을 현재 21%에서 2022년까지 30%로 늘리겠다고 했다. 중남미·중동·아프리카 등 신흥시장 수출 비중도 9%에서 15%로 늘리겠다고 했다. 그러면 미국·EU·일본 등 주력 시장 수출 비중은 53.4%에서 40%로 내려갈 것이라고 했다.

재계에서는 이런 목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재계 인사는 "초등학생의 도표 그리기 숙제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주력 시장 경제 규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흥시장에서 수출을 늘리는 것도 어려운데 그 비중을 절반 가까이 높이겠다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신남방, 신북방, 신흥시장 같은 말을 붙이면 뭔가 새 희망이 보일 것 같지만 현실을 너무도 모르는 탁상공론"이라며 "비중이 줄어들 것이라는 걸 목표치처럼 제시하는 건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6월 2030년까지 제조업 세계 4강에 들겠다는 정책 목표를 발표하면서도 '제조업 부가가치율을 25%에서 30%로, 신산업·신품목 비중을 16%에서 30%로, 세계 일류기업을 573개에서 1200개로 늘리겠다'며 '영혼 없는 숫자'를 늘어놨다.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 이해할 방법이 없다.

기자 초년병 시절, 박정희 대통령 관련 자료를 정리하다 그가 제시한 '숫자'를 보며 전율을 느낀 적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까지 팔아 10억달러 수출을 간신히 달성했던 1971년, 박 대통령은 "우린 100억달러 수출을 할 것"이라고 했고, 1965년 제2한강교(양화대교) 준공식 때에는 "앞으로 이런 한강 다리를 열 개쯤 더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비전을 제시하고 국가의 에너지와 의지를 모아내는 리더십이 경제를 이끌어 갔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일 국무회의에서 "세계 무역 갈등 심화와 세계 경기 하강이 우리 경제에 어려움을 주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내년부터 50인 이하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주 52시간제에 대해) 조속한 입법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미국·일본 경제가 호황을 구가할 때, 주 52시간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문재인 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와 국회가 잘 돌아갔다면 우리 경제는 지금 활력이 넘칠까.

'쇼', '영혼 없는 숫자', '남 탓'으로 점철된 경제가 기업인들의 힘을 빼고, 의지를 짓누르고 있다. 재계가 이를 극복하기에는 한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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