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가족 만나고 온 美시민권자의 눈물… "동생에게 난 죄인"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10.05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 살던 집안 동생 D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방 후까지 부친이 평양에 인쇄소를 갖고 있었는데 사장이라는 죄목으로 빼앗기고 황해도로 추방당했다. D는 크리스천이어서 불순분자 자녀로 몰려 교육도 별로 받지 못했다. D는 호기심이 강하고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6·25전쟁 때 탈북해 국군으로 입대했다. 제대한 뒤 미군 부대에 취직해 자동차 정비 기술 자격증을 취득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길을 택했다.

그가 워싱턴DC 부근에 살면서 볼보자동차 기술자로 안정된 생계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미국 시민권 소유자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고 온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적지 않은 달러를 장만해 평양까지 갔다. 안내원이 배정되었다. 물론 감시 책임자였다. 그에게 돈을 좀 주면서 "앞으로도 가족을 위해 올 기회가 생길 테니 친구가 되자"고 꾸며댔다. 보통강호텔에 머물며 사나흘 기다렸더니 시골에 살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D는 안내원을 따라가 모친과 두 남동생을 만났다. 전에 살던 집이 아니고 새로 꾸며진 깨끗한 집이었다. 아들이 미국서 왔다고 해 좋은 집으로 옮겨 왔다고 어머니는 설명했다. 아무도 없을 때 어머니와 귓속말로 나눴다는 대화다. "네 막냇동생은 빨갱이가 다 됐다. 무슨 얘기를 해도 들어두기만 해라." "큰동생은요?" "걔야 너와 같은 생각이지."

저녁상을 차려 놓고 가족이 둘러앉았다. 막냇동생이 "형님은 이렇게 살기 좋은 인민공화국을 배반하고 왜 적성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으로 갔느냐"고 힐난했다. "찾아오지나 말지. 형이 미국 놈이 됐다고 하면 우리는 앞으로 고생을 어떻게 견디라 합니까?" 그 얘기를 들은 큰동생은 "오늘은 그만하자. 형은 인민군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어 할 수 없이 미국까지 가게 된 거야"라면서 억지 설명을 했다.

안내원의 친절로 미국서 온 일행이 떠날 때는 순안 비행장으로 가족이 배웅을 나왔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어머니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큰동생은 "형님은 왜 나까지 버리고 갔어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평양에 가 살지는 못해요. 공산당원이 될 자격도 없고요"라고 했다. 막냇동생은 큰형의 손을 잡아주지도 않았다. D는 후일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서 "형님,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큰동생에게는 죄인이 되고, 막냇동생과는 형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라고 했다.

어렸을 적에 D가 옛날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고래와 코끼리 얘기를 지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토끼가 바다의 고래 꼬리와 산 너머 사는 코끼리 코에 밧줄을 매고 산 위에서 북을 쳤다. 두 거물은 밧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D가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궁금해하며 묻는다. 나는 "아직도 줄 당기기 싸움을 하지. 내일까지는 힘겨루기를 계속하니까 그 얘기가 끝나면 또 다른 옛날얘기를 해 줄게" 하고 달랬던 일이 기억난다. 어렸을 때는 모두가 행복했는데 그 따뜻한 사랑의 끈을 누가 끊어 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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