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보내는 독자 편지] 자식들에 너무 미안해서 광화문 나갑니다

  • 편집부
입력 2019.10.04 14:00 | 수정 2019.10.04 15:20

잘난 당신 덕에 난 못난 부모가 됐어요
거리에 서 본 적 없는 저도 집회 갑니다
악몽같은 지난 몇달, 이젠 제발 끝내주세요

인생 참 쉬우셨죠?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으니 그 선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이 다 믿어줬을 테지요. 그런 아이 꼭 있었어요. 자긴 아무 잘못 없다는 표정만 지으면 어떤 벌도 피해갔던.

그 인물로 세상 살기 참 편했겠죠. 스치는 눈길만으로도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내가 굳이 나서서 부탁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호의를 베풀고. 그런 삶이 당연하던가요.

좋은 머리로 세상을 보니 사람들이 참 미련해 보였겠어요. 뭐하러 안되는 일을 저리 애쓰나 한심해 보였죠? 머리만 조금 쓰면 되는데, 세상에 편한 길이 이리도 많은데 그게 왜 안 보일까 한심했겠죠. 그 길을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기는 하셨나요.

참 가정적이기까지 하시네요. 심약한 아내와 순진한 아이들을 돌보느라 몹시도 마음 아파 하시더군요. 그런데 왜 다른 가족은 안 보였을까요. 노심초사 자녀들의 앞길을 염려하는 이 나라 엄마들은 모두 들러리만 서면 되는 거였나요. 수능 날 비행기도 못 뜨는 이 나라에서 당신은 어찌 그리 돕는 손길들을 많이 경험하셨는지 저는 새삼 더욱 못난 부모가 되고 말았네요.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신 이름을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생년월일을 수시로 바꾸시는 분들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요. 당신이 빼앗아 가버려 더 이상은 내 나라를 마음껏 불러 볼 수도 없네요. 그 이름을 부를 때 파렴치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니 이 분노까지 힘 없는 우리의 몫인가요.

이제는 부디 잊혀지기 바래요. 끝이 안 보이는 악몽과도 같았던 지난 몇 달 간의 일들을 제발 끝내주세요. 이제는 당신과 당신 가족의 소식을 더 이상 듣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훗날 당신도 누구처럼 '언젠가 다 밝혀질 줄 알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겁니다. 너무 늦은 고백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광화문 가는 길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랑 담 쌓고 살았는데 그냥 집에 가만 있기가 그렇네요. 정치에 관심 없는 아줌마가 나갈 땐 문제가 심각한 거겠죠.

70, 80 년대를 신촌에서 살며 공부보다 시위를 더 많이 한 캠퍼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도, 사람 많은 곳에 가지말라는 아버지 말씀 때문에 한 번도 거리에 나서 본 적이 없는 중늙은이 아줌마가 광화문행 버스에서 씁니다.

오늘 우리 나라가 세워진 날인데 이 나이 되도록 나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 이 망가진 나라를 물려받을 자식들에게 너무도 미안해서, 그냥 집에서 뒹굴기에는 너무도 죄책감이 들어서.


익명의 독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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