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엄마가 마당에 쓰러져 통곡하자, 어린 나는 '왜들 울지?' 의아했다"

조선일보
입력 2019.09.30 03:11

[부친은 징용 노동자, 큰형은 징병 군인… '80세의 조종사 훈련 교관' 서호선씨]

"아버지가 후쿠오카 탄광 앞에서 찍은 누렇게 변색된 사진 한장…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마쓰에 형무소로 이감됐다는 기록
왜 수감됐는지 모르고, 1945년 12월 형무소서 폐결핵으로 사망
'조선의 가족에게 통보했지만 연락 안 돼 시신 가매장했다'고…"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시대(時代)에 속박되지만, 어떤 개인에게는 시대의 속박이 너무 극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민간 조종사 훈련 교관 서호선(80)씨를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05년 아시아나항공에서 기장으로 근무할 당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및 가족은 신고하라'는 정부 광고를 봤습니다. 노무자로 일본에 갔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아버지가 후쿠오카 탄광 앞에서 찍은 누렇게 변색된 사진 한 장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진과 호적등본을 첨부해 신청서를 냈다. 얼마 뒤 보강 자료를 제출하라는 회신이 왔다.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국가기록원을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국가기록원에서 아버지 이름을 검색하니 놀랍게도 일본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아버지 관련 문서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언제 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내 막냇동생이 출생(1941년 11월)한 뒤 떠나셨다고 하니까, 아마 1942년 이후였을 겁니다."

서호선씨는 “정부는 위로금 지급 전에 ‘추가 보상 요구를 제기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서호선씨는 “정부는 위로금 지급 전에 ‘추가 보상 요구를 제기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장련성 기자
―후쿠오카 탄광에서 일했다고 했나요?

"구체적으로 탄광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10월 2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시네마현 마쓰에 형무소로 이감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 수감됐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같은 탄광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동네 어른 말로는 '차별 대우하던 일본군 문관 출신인 현장 감독을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1945년 12월 23일 형무소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해방 뒤에도 일본 감옥에 갇혀 있었고 거기서 숨졌다는 겁니까?

"해방은 됐지만 일본 사법 체계에 의해 그렇게 됐던 것 같습니다. 당시 형무소 기록에는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통보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시신을 가매장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 연락이 닿지 않았을까요?

"우리 가족이 원(原)주소인 충남 부여에서 서천으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뒤늦게 연락이 닿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46년 인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이 전해졌습니다. 마당에서 엄마가 쓰러져 통곡했고, 누나도 울어대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상황인지 잘 몰라 '왜 저렇게들 울지?' 의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내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없었으니까요."

―그 뒤 아버지 시신을 수습했습니까?

"설령 알아도 일본에 갈 형편은 안 됐지요. 형무소 기록에는 '가매장을 해놓으니 큰아들이 시신을 인수해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큰형과는 연락이 끊겨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큰형은 어떻게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러 일본까지 간 겁니까?

"1924년생인 큰형은 덕수상고를 나와 서울에 있는 일본 제본(製本) 회사의 자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쿄 본사로 발령 나 일본에 있었던 것이죠. 큰형은 1944년 9월 10일 징병됐습니다. 근무처는 일본 본토에 있는 부대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국가기록원에는 형과 관련된 문서철도 있었습니다. 일본 부대장이 우리 동네 면장 앞으로 보낸 '서○○가 이등병으로 입대했다'는 편지도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일등병으로 진급했고, 봉급은 몇 엔 얼마'라는 것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도 이렇게 빈틈없이 기록해놓은 일본인들에게 정말 놀랐습니다."

―한 집안에서 아버지는 탄광 노무자, 큰형은 징병 군인인 경우는 흔치 않을 겁니다. 해방된 뒤 큰형은 어떻게 됐습니까?

"문서에는 '1945년 8월 30일, 종전(終戰)으로 복귀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복귀했다는 것은 직장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겠지요. 큰형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집으로 '여기서는 다들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필요하면 내가 연락할 테니 먼저 연락은 하지 말라'며 가족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전후(戰後) 일본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이 한국인임을 감춰야 했던 것 같습니다."

간간이 소식을 전하던 큰형은 6·25가 발발한 뒤로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쭉 실종 상태였던 것이지요. 큰형의 실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만 2년 걸렸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아버지의 강제 동원 피해 배상을 신청하니까, 내가 가족 대표로서 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형제들(4남 2녀)의 인감 증명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행방불명된 큰형에게 어떻게 인감을 받습니까. 법원으로부터 실종 선고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동네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큰형이 일본에 갔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증언을 받아내 제출했습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법원은 큰형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호적 정리가 됐습니다. 징병에 끌려갔던 큰형에 대해서도 피해 배상 신청서를 냈습니다."

서호선씨 아버지(왼쪽)와 큰형.
서호선씨 아버지(왼쪽)와 큰형.

탄광 노무자 아버지에 대한 피해 배상 신청을 낸 지 5년 만인 2010년 여름 '위로금 지급 결정서'가 그에게 배달됐다.

"아버지 사망 위로금 2000만원을 우리 5남매가 400만원씩 나눴습니다. 관련 서류를 찾고 증언을 받기 위해 애썼던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고작 400만원이었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아버지의 마지막을 정리했다는 보람이 훨씬 더 컸습니다. 그 뒤 큰형에 대한 위로금도 2000만원이 나왔습니다."

―개별적으로는 큰 액수가 아닐지 모르나, 정부가 지금까지 관련 피해자 7만8083명에게 지급한 위로금은 총 6418억원쯤 됩니다. 그 뒤 몇몇 징용 피해자 및 가족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금 청구 소송을 했지요.

"2010년 정부 위로금을 받게 되자,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 연합회 같은 단체에서 '추가로 배상을 더 받을 수 있으니 신청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가입 회비를 내면 집단소송을 통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담당 변호사들이 직접 전화도 걸어왔습니다. 나는 '이미 각서에 서명했는데 어떻게 더 받느냐. 양심상 허락하지 않는다'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각서를 말합니까?

"정부는 위로금을 지급하기 전에 '향후 국가를 상대로 추가 보상 요구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습니다. 위로금을 받은 사람들은 거기에 서명했습니다. 위로금을 안 받았으면 몰라도, 그렇게 서명을 한 이상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우리 정부와 주고받은 각서이지, 소위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해 배상 청구를 안 하겠다는 약속은 아니지 않은가요?

"자구(字句)를 따지면 그럴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소송을 한 분들은 그 나름대로 억울한 마음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징용·징병 피해에 대한 위로금을 국민 세금으로 지급한 것은 당시 노무현 정부가 '이는 일본에 떠넘길 게 아니고 우리 안에서 해결할 문제'로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모든 걸 매듭짓자는 취지로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봅니다."

―작년 말 우리 대법원은 '손해와 고통에 따른 개인 청구권이 살아 있다'며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리면서도 그 의미와 파장을 몰랐습니다. 이는 1965년 한일 협정 이래 지속돼온 한일 외교 체제를 뒤엎는 것이었지요. 문 대통령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연두 회견에서 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 정부는 더 겸허해야 한다. 한국은 삼권분립의 나라이고 사법부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요. 결국 무역 제재 조치와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이어졌습니다. 청와대가 '반일 감정'을 부추기자 일본에서는 극우 성향 정치인들이 무대 전면에 배치됐습니다.

"국내에서 해결될 문제라면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징용 배상 판결은 국가 간 문제입니다. 우리 사법부가 아니라 외교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삼권분립하에서 사법부 판단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역할이 어디에 있습니까."

6년 전 '현역 최고령 조종사'라는 제목으로 그의 인생 스토리를 한번 쓴 적이 있었다. 그는 신문사 사환으로 일하면서 야간고를 다녔다. 1959년 그 사환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19기)했다. 하지만 생도 1학년 때 가족 신원(身元)이 뒤늦게 문제가 돼 퇴교 조치됐다.

그가 '연좌제'의 부당함에 대해 눈물로 호소하자, 군 당국은 '이미 퇴교 조치가 됐으니 복교는 어렵다. 하지만 내년에 다시 시험을 쳐 들어가면 신원 관계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듬해 그는 공사(空士)를 택했고 조종사가 됐다. 조종 훈련 중 단체 기합을 받을 때 야구방망이에 잘못 맞아 척추 뼈가 어긋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규정상 기동(機動)이 심한 전투기를 탈 수 없어 수송기 부대로 전출됐다.

1982년 그는 비행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6월 그의 부대 조종사가 특전사 훈련병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한강 미사리에서 낙하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베테랑 조종사에게는 익숙한 항로였다. 하지만 이륙한 수송기는 구름 속 청계산을 들이받았다. 조종사와 훈련병 등 53명 전원이 숨졌다. 그는 "내게도 지휘 책임이 있다"며 군복을 벗었다.

그 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 조종사로 근무했다. 정년을 마친 뒤에는 항공 촬영 회사로 옮겨 경비행기를 몰았다. 비행 조종간을 직접 잡은 햇수만 53년이었다. 요즘 그는 민간 조종사 훈련 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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