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온돌에서 나고 온돌에서 자랐으며 온돌에서 죽을 것이다.'
역사학자 겸 민속학자 손진태는 1928년 잡지 '별건곤'에 한민족의 문화는 '온돌을 태반으로 하여 탄생하였으며 우리의 민족성은 온돌을 자모(慈母)로 하여 훈육되었다'고 썼다. 온돌을 한민족의 특색으로 못박은 것이다.
온돌(ondol)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오를 만큼 한국의 독특한 난방 시스템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아궁이에서 불을 때 열기가 바닥 아래 통로(고래)를 지나 굴뚝으로 배출되면서 구들장을 데우는 방식이다. 하지만 온돌의 역사는 문헌 자료가 빈약한 데다 역사학·고고학·민속학·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어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송기호(63) 서울대 교수가 이번 주 낸 '한국 온돌의 역사'(서울대출판문화원)는 200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 한민족이 살아온 주거 공간에 면면히 이어진 온돌의 기원과 변천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발해사 연구자인 송 교수가 온돌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90년대 러시아 연해주 마리야노프카의 발해 성터를 찾았다가 러시아 교수와 나눈 대화가 계기가 됐다. 이 러시아 교수는 발해 온돌의 기원으로 고조선을 지목했다. "과연 그럴까."
생활사에 관심 많았던 그는 2002년부터 '온돌'에 미쳐 살았다. 2006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서 발굴된 고구려·북옥저·발해의 쪽구들(방의 일부만 덮어 데우는 구들)을 연구한 '한국 고대의 온돌'을 냈다. 온돌(溫突)은 원래 '따뜻한 굴뚝'이란 뜻으로 난방 시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 온돌의 순 우리말이 '구들'(구운 돌이란 뜻)이다. 온돌식 난방은 고대 로마와 몽골과 자바이칼의 북흉노, 알래스카, 중국 화북 지방에서도 발견되지만 현재까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곳은 한민족뿐이다.
송 교수는 극동(極東)의 온돌 기원을 2000여 년 전 북옥저의 쪽구들로 짚었다. 고조선·부여엔 쪽구들 유적이 없고 고구려 건국지로 알려진 오녀산성엔 4세기 말~5세기 초에야 쪽구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현재의 한·중·러 국경 지역인 함경북도, 길림성 동부·흑룡강 동남부, 연해주 남부를 무대로 활약한 북옥저가 남긴 쪽구들 유적은 여럿이다. 북옥저인이 남하하면서 경기권과 경상도 해안에서 쪽구들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엔 방 전체에 구들을 놓는 온구들이 등장해 점차 쪽구들을 대체하게 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온돌이 하층에서 상층으로 퍼져 나간 생활 문화라는 점이다. 발해 궁터에서 온돌이 나오는 걸 제외하면 고구려나 백제·신라는 물론 고려 전기까지 외곽 지역에서 온돌이 집중적으로 발굴됐다. 상류층은 13세기 들어서야 온돌을 쓰기 시작했다. 조선은 16세기 중반까지 임금이 나무 침상을 썼고, 17세기 무렵 궁궐에 입성했다. 온돌은 1500년이 지난 조선 후기에 와서야 한반도 전역에서 모든 계층이 애용하는 민족의 생활 문화가 됐다.
온돌이 유행하면서 좌식 생활이 일상화됐고 2층 집이 사라졌다. 무게 때문에 2층에 구들을 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땔감을 아끼기 위해 집의 규모도 작아졌다. 폐해도 만만찮았다. 장작을 땔감으로 쓰느라 민둥산이 늘어났다. 구한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은 '방 안에 온기가 지속됨으로써 수많은 파리와 벼룩, 벌레, 바퀴들이 창궐했다'고 썼다. 하지만 온돌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온수관을 이용해 구들장을 데우는 현대식 온돌로 변신에 성공하면서 아파트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송 교수는 말한다.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흰 옷 입은 사람은 주변에서 찾기 어렵게 됐다. 온돌은 200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찜질방 같은 새로운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이제부턴 백의민족 대신 '온돌민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