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히카리는 이제 옛말… 한국쌀이 가장 맛있다

조선일보
  •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입력 2019.09.21 03:00

[아무튼, 주말] [이해림의 더 맛있는 맛] (6) 밥맛 100년史(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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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은 잘고 한 알 한 알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향은 구수하고, 맛은 달았다. 차지되 찐득대지 않는 경쾌한 찰기가 입안에 쩍쩍 붙었다. 이런 밥은, 간장 종지 하나 놓고 먹어도 한 그릇 뚝딱이다. 추석 직전 출하된 신품종 '해들' 쌀로 지은 밥이 그랬다. 탄력 있게 씹히는 해들과 달리, '운광'은 입안에서 보드랍게 풀어지는 축이다. 추석 직후 찾은 수원 광교의 '동네정미소' 점심 밥상에는 운광 햅쌀이 올랐다. 밥이 살짝 질게 됐어도 쫀쫀한 찰기가 유쾌했다. 밥 한 공기가 향기롭고 달콤해, 쟁반에 놓인 찬이며 국까지 싹 비웠다.

새하얗고 뜨끈한 밥 한 공기! 밥에는 저항할 수 없는 마성이 있다. 그 앞에선 다이어트도 무력해진다. 애초에 한식은 밥을 중심에 두고 밥을 위해, 밥에 의해 발달했다. 한국인으로서, 아무리 호사스러운 반찬으로 가득하더라도 밥이 빠져서야 용(龍)을 다 그려 놓고 눈을 그리지 않은 격이다. 하나 반전. 한국인이 이토록 맛있는 밥을 실컷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일이다.

냉면만 한 고봉밥을 단출한 소반 위에 둔 개화기 조선인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보았다. 그만큼 밥을 많이 먹었다. 외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는 조선인이 먹는 양에 대한 실소인지 경외인지 모를 감상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당시 쌀은 모두 토착 품종이자 토종 쌀. 지역마다 동네마다 농부마다 제각기 품종의 대를 이어 쌀농사를 지었다. 현대 쌀처럼 맛있는 쌀도 있었겠으나 단지 수확량이 많은 쌀, 벼가 잘 눕지 않는 쌀 등 제멋대로 생겨난 야성의 토착종 쌀이 다양하게 분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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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요즘 싸전의 쌀 포장은 예뻐졌고, 작아졌다. 왼쪽부터 도정공장, 동네정미소, 동수상회, 일산쌀의 쌀 패키지. ②현대백화점 7개점에 입점한 현대쌀집. ③단일 품종 쌀을 농부와 직거래해 판매하는 동수상회./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이해림

밥맛, 격변의 100년사

그리고 100년 후 우리 곁의 밥은 한반도 격변사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쌀 이름, 고시히카리와 아키바레(추청), 히토메보레에 쌀의 100년 역사가 함축돼 있다. 밥맛 좋다고 소문난 이 쌀들은 모두 일본 쌀 품종. 한동안 일본 쌀이 맛있다고 한국에서 손꼽힌 데에 광복 후 한국과 일본의 처지 차이가 함축돼 있다.

일본과 한국은 전 세계에서 밥 입맛이 가장 비슷한 인접국이다. 자포니카 계열 쌀이 잘 자라고, 이 쌀을 선호한다. 자포니카(Japonica)라는 이름부터가 일본이 먼저 서구에 문물을 공개했기에 선착순처럼 붙은 이름이다. 이 쌀은 차지고 단맛이 좋다. 쌀의 다른 갈래 중 대표적인 인디카는 퍼석하게 날리고 길쭉한 쌀이다. 안남미로 대변되는 동남아 쌀들이 그렇다.

이른 개화 후 기술 발전을 끊김 없이 이었던 일본은 일찌감치 쌀 맛에 주목할 여유가 있었다. 밥맛에 대한 연구가 한참 앞서 갔다. 맛있는 쌀을 만들어 밥을 지어 먹었다. 그 결과가 지금 한반도 들녘에서 널리 재배하는 현대 일본 쌀들이다.

반면 한국의 사정은 맛보다 양이었다. 조선시대 야생종에 가까운 쌀들은 현대적으로 개량되지 않은 품종이었다. 현대 농업이 태동하던 1900년대 이후 일제 시절 질소비료와 현대적 육종이 이식되어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결국 식민지의 용도는 식량 수탈에 있었다. 광복에 이어 한국전쟁을 겪느라 배를 주리고 발전이 더뎠던 한국이 해결해야 할 급선무는 고유 품종 개발, 그리고 식량 증산이었다. 그 시절이 오래고 길었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박정희 정부까지도 쌀은 내내 귀했다. 밀가루를 먹도록 강제했고, 잡곡을 섞어 먹도록 강권했다. '기적의 벼'에 대한 집념은 그 시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국가 생존 전략이었다. 배 곯지 않도록, 실컷 흰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소출 많은 쌀 품종 육종이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기적의 볍씨가 바로 통일벼였다. 인디카와 자포니카 쌀을 접붙여 엄청나게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쌀이었다.

대신 비료를 어마어마하게 투입해야 했고, 무엇보다 맛이 없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배석한 시식회에서 맛없다는 평가가 몰표로 나왔다. '근현대 한국 쌀의 현대사'에 따르면 무기명 투표였던 시식회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맛있다"고 쓰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적어냈던 것은 쌀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다. 통일벼는 그렇게 보급됐다. 아무튼 쌀 생산량 수치는 혁신적으로 커질 수 있었다. 맛이야 어쨌건 배는 채우게 됐다.

식량 증산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맛을 추구하기 시작했는데, 옆 나라 일본을 보니 이미 맛있는 쌀 품종이 지천이었다. 그래서 빠른 방편으로 일단 일본이 그 사이 개발해둔 맛있는 쌀 품종을 가져다 심어 먹었다는 귀결이고 그 결과가 고시히카리, 아키바레, 히토메보레다. 이 중 고시히카리와 아키바레는 일본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는 품종이라 근자의 일본산 불매 움직임에 억울한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 짙다.

맛 좋은 쌀이 서 말이어도, 소비는 급감

경천동지. 격세지감. 아무튼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 남아도는 쌀이 되레 문제다. 사람들이 도통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난리다. 1인당 쌀 소비량이 꾸준히 하강 중이다. 한식 외 달리 선택할 음식이 늘어나며 밥이 생략된 식단을 선택할 여지가 많아졌다. 되레 밥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시절이다. 한국의 밥맛 연구가 아직 입맛을 못 따라오던 시절, 일본 쌀이 밥맛 좋은 쌀로 이름을 일찍 알렸다. 단지 그뿐이다. 이제는 한국 쌀이 블라인드 평가에서 더 호평받는다.

맛 좋은 한국 쌀 품종이 얼마든지 지천이다. 실제 인기리에 재배되는 맛 좋은 밥쌀도 한국 품종이 더 많다. 이를테면 2019년 농식품부의 벼 보급종 공급 현황에서 고시히카리 보급량은 456t에 불과하다. 아키바레가 2309t인데 전체 1만9635t 중 두 일본 품종이 차지하는 비율 실상은 존재감보다 훨씬 작다. 히토메보레는 정부 보급종이 아닌 민간 보급으로 종자가 소량 유통된다. 한국 쌀 품종인 삼광, 신동진, 일품 등이 정부 보급 종자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맛 좋은 밥쌀이다. 일본 불매운동은 최근 현상이지만, 쌀 육종사를 길게 놓고 보면 현재는 마침 한국 쌀 연구의 특이점을 지나 우수한 품종이 풍족한 시기다. 어차피 쌀 연구의 오랜 목표는 쭉 일본의 쌀 품종과 기술 잔재를 한국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타이밍이 겹쳤다.

농촌진흥청은 '최고 품질 쌀'을 선정해 우수한 한국 쌀 품종을 알리고 있는데, 현재까지 무려 18가지 품종이 선정돼 있다. 가나다순으로 고품, 대보, 미품, 삼광, 수광, 영호진미, 예찬, 운광, 진광, 진수미, 청품, 칠보, 하이아미, 현품, 해담, 해들, 해품, 호품이다. 특성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쌀을 구매할 때 이런 품종을 골라 사면 어지간히 실패가 없다는 의미다. 이 중 해담, 진광, 해품, 청품은 아직 재배 면적이 작아 구하기 쉽지 않고, 해들은 올해 '임금님표 이천쌀' 브랜드로 대대적으로 출시했다. '어느 쌀이 가장 맛있나?'라는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밥쌀의 맛은 상향 평준화되어 있다.

'근현대 한국 쌀의 현대사'를 쓴 전북대 김태호 교수는 "밥 문화권인 한국의 밥 취향은 찰기와 윤기, 단맛을 중시한다. 향에는 덜 민감하다. 밥 짓기에 이상적인 쌀의 조건이 이미 좁아져 있고, 그 좁은 범위 안에 부합되는 쌀 품종이 이미 만족스럽게 나와 있다. 맛있다고 여겨지는 밥쌀 품종 간 차이는 미세하다"고 말한다.

구매할 때 고려해야 할 맛있는 쌀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쌀 포장의 뒷면을 보자. 이런 저런 품종을 뒤섞은 혼합미가 아닌 단일 품종이어야 한다. 그래야 밥이 솥 안에서 고르게 된다. 도정 시기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신선 식품인 쌀은 도정 후 2주 이내에 먹어야 가장 맛나다. 특히 오래 보관한다면 산패를 늦추기 위해 냉장 보관도 강력하게 권장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쌀을 실패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길이 무척 가까워졌다. 대형 마트에서 단일 품종 쌀을 즉석 도정해준 지도 오래다. 쿠팡 등 온라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트 바깥에선 동네정미소, 동수상회, 도정공장, 일산쌀, 현대쌀집 등 온·오프라인 프리미엄 싸전이 줄이어 등장하며 잔잔하지만 뚝심 있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1~2인 가구 소비 패턴에 맞춘 1㎏ 이하 소포장이 일제히 등장한 것도 특기할 점이다. 진공 포장한 팩 등에 담아 도정 후 신선도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런 소포장 쌀은 근사한 선물용, 또는 10·20㎏ 단위로 주식이 될 쌀을 대량으로 사기에 앞서 맛보기로도 유용하다.

밥 소믈리에가 맛에 따라 품종 소개… 쌀 정기 구독 서비스도

맛 좋은 쌀 파는 프리미엄 싸전

동네정미소

밥맛 좋은 단일 품종 쌀뿐 아니라 희소한 토종 쌀, 잡곡까지 두루 취급한다. 서울 성산동과 서교동에 이어 수원 광교에도 지점을 냈다. 식혜, 막걸리, 뻥튀기 등 쌀 가공식품과 참기름, 꿀도 취급한다. 점심과 저녁 한 상 식사도 판매한다. 날마다 품종을 달리해 가며 단일 품종 쌀로 밥을 짓는다.

동수상회

서울시청 앞 지하 스타시티몰에 자리한 쌀 전문점. 도정 날짜를 지킨 단일 품종 쌀을 농부와 직거래해 판매한다. 밥 짓기 좋은 무쇠솥, 제주 참기름 등 쌀과 인접한 상품 외 그림책까지 취급하는 복합 상점이다. 각 지역별로 잘 자라는 품종의 쌀을 매치해 소개하고 있다.

현대쌀집

지난해 말부터 현대백화점 식품 매장에 입점해 지점을 늘려가고 있다. 현재 무역센터점, 판교점, 목동점, 신촌점, 충청점, 부산점, 울산점 등 7개점에 입점해 있다. 20여 종의 단일 품종 쌀을 취급하며 찰기와 단단함 정도에 따라 밥쌀의 특성을 그래프로 시각화하는 등 전문성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취반협회가 부여하는 밥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한 박재현씨가 쌀을 맛과 기능 특성에 따라 큐레이션하고 있다.

도정공장

경기도 이천에 베이스를 둔 쌀 판매 업체. 세련된 브랜딩으로 쌀의 격을 올린다. 원하는 품종과 분량의 쌀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요즘 쌀 소비 트렌드를 꿰뚫었다. 진상 품종의 맵쌀 외에도 진상 쌀에 흑미, 녹미, 적미를 블렌딩한 삼색미를 ‘밥의 진미’라는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해들, 삼광, 영호진미 등 품종을 오는 10월 중순까지 추가 출시 예정이다.

일산쌀

3대에 걸친 가업을 이어받은 청년 농업법인회사. 경기도 고양시에서 벼농사를 짓는다. 분유통 모양의 기발한 캔 포장에 젊은 취향의 디자인으로 쌀에 감각을 더했다. 10월 초 햅쌀 출시 후 네이버 스토어팜과 the착한가게, 컨비니 등 식품 쇼핑몰에서 판매 예정이며 마르쉐@나 일산 지역 농협로컬푸드직매장에서도 판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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