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고 아꼈지만, 결국은 스티로폼 컵에 따라버린

조선일보
  • 이용재 음식평론가
입력 2019.09.21 03:00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9) '사이드웨이'와 1961년산 슈발블랑

되는 일은 없고,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듯하다. 마일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껴뒀던 최고급 빈티지 레드와인 1961년산 슈발블랑을 패스트푸드점에서 스티로폼 잔에 따라 싸구려 햄버거에 마셔버린다.
되는 일은 없고,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듯하다. 마일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아껴뒀던 최고급 빈티지 레드와인 1961년산 슈발블랑을 패스트푸드점에서 스티로폼 잔에 따라 싸구려 햄버거에 마셔버린다. / 영화 캡처
마일스(폴 지아매티 분)는 우울하다. 좋은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우다 2년 전 이혼당했고, 중학교 교사지만 일에서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와인과 데뷔를 꿈꾸며 완결한 소설 원고가 유일한 희망인 가운데 결혼을 앞둔 떠버리 친구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 분)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버라 지역으로 총각 파티를 떠난다. 와인 컨트리(생산지) 특유의 광활하면서도 고즈넉한 풍광 속에서 즐겁게 먹고 마시는 가운데 안면을 텄던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마야(버지니아 매드슨 분)와 교감을 이루기 시작한다.

그러던 가운데 찰나의 말실수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 잭이 며칠 뒤 결혼할 거라는 둘만의 비밀을 마야에게 흘려 버린 것. 결국 분위기는 박살이 나 버리니 잭은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지고 마일스는 마야에게 외면당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공들여 온 소설 원고의 퇴짜 소식마저 듣는다. 잭의 결혼식에서 인상 좋아 보이는 사업가와 재혼해 임신한 전처와 마주친 마일스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패스트푸드점에서 아껴둔 고급 프랑스산 포도주 1961년산 슈발블랑(Cheval Blanc)을 스티로폼 컵에 몰래 따라 햄버거와 함께 욱여넣는다.

'사이드웨이'는 비(非)다큐멘터리로는 가장 재미있는 와인 영화로 꼽을 수 있다. 와인을 몰라도 즐길 수 있고, 와인을 알면 자잘한 재미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와인을 막 공부하며 마시기 시작했던 시절에는 특유의 어두운 유머 감각 위주로 영화를 즐겼는데, 십여 년이 지나 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된 지금 보니 또 다른 지점에서 시쳇말로 '빵빵 터진다'. 아무래도 핵심은 와인 애호가로서 자폭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빈티지(vintage) 와인의 낭비이다.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마시려고 아껴 두었던, 명망 높은 와이너리의, 그것도 두드러지게 잘 나왔다고 소문난 해의 비싼 와인을 그렇게 마셔 버리다니!

나의 일처럼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일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와인에 관심 많은 이라면 일상에 와인을 가까이 두는 한편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마실 만한 것들을 따로 쟁여 두는 경향이 있다. 마일스가 염두에 둔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소설 원고의 출간 계약 또는 출판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 이런 직업적 성취의 축하 외에도 결혼이랄지 자식의 출생 등을 계기로 와인을 사서 모은다. 이를테면 자식이 태어난 해에 와인을 사서 성인이 되는 해에 함께 마시는 식이다.

나 역시 요즘은 책 쓰기와 겹쳐 건강을 이유로 집에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지라 와인 수집도 드문드문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 냉장고에 정확히 무엇인지도, 언제 올지도 모를 빛나는 순간을 위해 아껴 둔 몇 병이 있다. 그러나 이런 와인을 위한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기는커녕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면? 정말 자폭하는 마음으로 아껴 두었던 와인을 따서 마셔버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편 마야의 대사처럼 마시는 순간이 특별해질 정도로 와인이 아름다울 수도 있으니 자폭을 위해 딴 와인으로부터 위로받을 가능성도 있다.

마일스가 마신 1961년산 슈발블랑.
마일스가 마신 1961년산 슈발블랑.
그런데 1961년산 슈발블랑은 대체 어떤 와인인가? 1832년에 설립된 슈발블랑은 프랑스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에서 넷밖에 안 되는 최상급 레드와인으로 영화 개봉 당시의 시세는 약 110만~130만원이었으며 현재는 10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라고 생각하면 속 편하다. 빈티지 와인의 세계는 파고들어가자면 무저갱처럼 끝이 없는데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와인은 몇십 년 이상 두었다가 마실 수 있는데 맛이 차츰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둘째, 슈발블랑이나 로마네콩티처럼 와인에 관심이 아주 많지 않더라도 들어보았을, 완성도 등으로 유명하고 비싼 와인들이 있다. 셋째, 이런 와인들 가운데서 특히 기후나 작황 등에 따라 여느 해보다 더 우수한 것들이 꼽힌다. 슈발블랑의 경우라면 1961년 이후로는 1964년, 1982년 등 2018년까지 57년 동안 18개의 빈티지가 우월한 것으로 꼽히고 거래가에도 반영된다.

사이드웨이의 가장 큰 와인 아이러니는 메를로를 향한 마일스의 혐오이다. "메를로, 빌어먹을 메를로는 안 마신다고!"(한국어 자막으로는 '싸구려 와인은 안 마신다고!'라고 번역되어 있다)라며 발악에 가깝게 메를로를 싫어한다. 자체로는 짜임새가 약한 메를로는 프랑스에서 대체로 '받쳐주는' 조연 품종이니 혐오를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슈발블랑은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의 와인으로 카베르네프랑에 메를로를 거의 절반 비율로 블렌딩하니 마일스의 취향대로라면 싫어하는 편이 더 이치에 맞을 것 같다. 그래서 1961년산 슈발블랑과 햄버거는 좋은 조합이었을까? 햄버거라면 감자 혹은 양파 튀김까지 감안해 시원하게 씻어 내려주는 맥주가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수는 고기이니 레드와인과 안 어울릴 수가 없다. 레드와인의 과일 향과 타닌(떫은맛)이 소고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이다.

다만 영화 속의 여건에서 마신다면 문자 그대로의 '패스트' 푸드가 40년 쌓아온 세월을 단숨에 쓸어버려 제 맛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아무래도 고기 자체보다 케첩 등의 소스가 치명적이리라. 따라서 과일 향이 좀 더 폭발하는 적당한 가격대의 캘리포니아 진판델 수준에서 타협하고 내일을 도모하는 게 마일스로서는 현명한 처사였을 것이다. 우리의 여건이라면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잘 어울릴 진판델을 마트에서 3만원대에 찾을 수 있다.

물론 그가 '극혐'하는 메를로도 햄버거의 짝으로서는 나쁠 게 없다. 피노누아나 진판델이라면 대체로 다른 품종에 비해 진입가가 높은 축에 속하는 반면 메를로라면 소위 '가성비'가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슈발블랑의 경우처럼 배경을 깔아줄지 몰라도 미국, 특히 기온이 낮은 북쪽의 워싱턴주산(産)이라면 단일 품종으로 빚은 와인도 흔하고 수입도 되어 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