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수박 한 덩이가 잠재운 아파트 공사 소음

조선일보
  • 박진수 LG화학 이사회 의장
입력 2019.09.17 03:08

에세이 일러스트

지난 초여름 바쁜 일정 때문에 미뤄왔던 고관절 수술을 마침내 하게 됐다. 진즉 했어야 할 수술을 미룬 탓에 뼈 손상이 많아 적어도 3개월 동안은 수술한 쪽의 발을 바닥에 절대 딛지 말라고 의사가 강조했다. 하는 수 없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하루 한 번 아내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아파트 한 바퀴 도는 외출을 빼고는 집 안에만 있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8층인 우리 집의 아래인 16층 이웃이 한 달간 집수리를 하면서 적잖은 소음에 시달렸다. 다행히 집수리 중인 그 이웃은 평소 친숙한 사람들이어서 그나마 참을 만했다. 그런데 16층 집수리가 마무리될 무렵 이번엔 바로 윗집인 19층에서 집수리를 시작한다는 공고문이 엘리베이터에 붙었다. 집 안에만 박혀 무더위와 씨름해야 하는 이 한여름에, 그 수리 공고문은 솔직히 두렵기까지 했다. 다음 날부터 엄청난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온 아파트를 뒤흔드는 철거 소음을 앞으로 한 달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이 시간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견딜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선한 생각이 계시처럼 떠올랐다.

아내를 불러 가장 크고 좋은 수박을 한 덩이 사서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갖다 주자고 제안했다. 어리둥절하던 아내도 금세 내 뜻을 알아차렸다. 엘리베이터 안 공고문에 적힌 공사 책임자의 전화번호로 연락해 "바로 아랫집에 사는 사람인데 잠깐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 책임자는 당연히 항의하러 오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더운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제 보니 공사 시작과 종료 시간도 잘 지키시고, 끝난 뒤 쓰레기도 말끔히 치우시더군요. 휠체어 생활 중인 저를 위해 가능하면 소음을 적게 내려고 배려하시는 마음도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감사의 말씀 드리려고 올라왔습니다."

짐작하건대 예상과 다른 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공사 책임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평생 집수리 여러 번 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수박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군요. 이해해줘 정말 고맙습니다" "죄송하긴요. 오래된 아파트라 집수리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요." 집으로 내려와 있는데 잠시 후 그 책임자라는 분이 전화를 했다. "아까는 제가 감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혹시 고치실 거 있으면 무료로 다 수리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고칠 것 없고요, 있더라도 비용 들여서 해야지요."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참 가볍고 신선했다. 이어진 한 달간의 공사는 예상대로 소음과 전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거슬리지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면 이 사람들이 공사를 제대로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 되었다.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후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한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불만을 토로하려다가 내가 그분들에게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기도 했다. 올여름은 수박 한 덩이로 집수리의 소음을 전혀 소음으로 느끼지 않는 평안을 체험했고 덩달아 이웃 간에 따뜻함을 주고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올여름은 잘 보낸 것 같다. 그 와중에 시간은 흘러 나도 이제 휠체어를 벗고 조금씩 걷고 있으니 신선한 초가을 바람이 더 신선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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