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과 시간보낸다"는 영상에 판사·검사·변호사가 "잘했다" 댓글다는 이유

입력 2019.09.14 14:20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된 한 비공개 카페. 'TREATMENT'(치유)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는 매일 저녁 짧은 영상이 올라온다. 지난달 23일 보석으로 석방된 허모(34)씨가 올리는 것이다. 영상의 주인공은 주로 허씨와 허씨의 두 자녀들이다. 허씨의 영상이 올라오면 판사와 검사, 변호인 등이 '격려의 댓글'을 단다. 이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허씨는 지난 1월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다른 차량을 들이받았다. 사고 뒤 피해를 수습하지도 않았고, 출동한 경찰의 음주측정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도주치상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허씨는 1심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허씨의 항소심은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가 맡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항소심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담당하는 재판부다. 재판부는 허씨를 직권 보석으로 석방했다. 보석 조건은 석 달간의 금주(禁酒). 밤 10시 이전에 귀가하고, 비공개 온라인 카페에 동영상을 포함한 일일 보고서를 매일 올리는 것도 포함됐다. 보증금은 없다. 통상의 보석조건과는 크게 다르다.

허씨가 카페에 동영상을 올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귀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시계가 보이게 찍고, 일과도 간단히 소개한다. 아내·아이들과 식사하는 모습, 아이가 아빠 품에 안긴 모습 등도 영상에 담겨있다고 한다. 재판장인 정 부장판사와 검사, 변호사는 '칭찬'과 '격려'의 댓글을 올린다고 한다.

구속 피고인이 보석으로 풀려나면 재판부와 검찰·경찰 등 관계기관은 주기적으로 보석 조건 준수 점검 회의를 연다. 허씨에 대한 보석 조건 준수 회의는 인터넷 카페의 채팅창에서 열린다. 대면(對面)하지 않아도 돼 편의성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재판부는 허씨에게 한 달에 한 번 직접 법정에 나오라고 했다. ‘온라인’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점검하자는 취지다. 허씨는 이달 27일 법원에 나온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치유법원'이다. 알코올 중독 등 범죄자의 '이상 상태'를 치유해 재범을 방지하고 사회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문제해결법원(problem-solving court)'의 하나라는 게 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형벌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보완적 형사시스템이기도 하다.

정 부장판사가 이끄는 서울고법 형사1부는 문제해결법원으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증 치매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60대에게 직권으로 보석을 허가하고 주거지를 치매 병원으로 제한했다. 치료적 사법(therapeutic jurisprudence)의 일환이다. 정 부장판사는 2013년 인천지법 부천지원장으로 근무하며 '형사화해제도'라는 이름의 문제해결법원 성격의 프로그램을 시범 시행하기도 했다. 형사재판에 조정절차를 도입해 형사 뿐만 아니라 민사·가사 분쟁까지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식이다.

문제해결법원의 대표적 유형은 '치유법원'이다. 영미권 국가에서는 알콜치유법원(Alcohol Treatment Court)과 약물치유법원(Drug Treatment Court)을 설치해 운영한다. 미국 뉴욕주에만 180여개의 약물치유법원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 이후 치유법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제도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법조계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의 실험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 재판부의 실험에 따라 도입하자는 논의에 속도가 붙을 수도, 좌초될 수도 있어서다. 정 부장판사는 "결국 누군가는,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라며 "주어진 여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범 시행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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