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TALK] 가상현실(VR), 운전 시 터널 공포증·공황장애 '해결사'로 부상

입력 2019.09.13 07:19

길병원에서 VR 기기를 통해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는 모습. /길병원 제공
길병원에서 VR 기기를 통해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는 모습. /길병원 제공
자동차를 타고 터널을 지날 때마다 식은 땀을 흘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극도로 공포감을 느끼는 공황장애 환자 A씨. 그에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헤드셋을 장착하게 하자, 화면에 도로가 보인다. 그는 컴퓨터에 설정된 화면을 통해 가상으로 운전을 하고 도로를 주행했다. 처음에는 입체적인 화면을 통해 터널을 통과하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VR을 접속해 자동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공포감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이제 현실에서도 운전을 하고 터널을 지나더라도 공포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이같은 특정 상황에 대한 공포증은 VR을 통해 반복적으로 체험할 때 긴장감이 완화된다.

VR을 통해 공황장애, 각종 공포증을 겪는 환자를 돕는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다. VR은 주로 항공·군사 분야에서 공군 장교나 비행사가 비행 전 항공기 조종 연습을 위해서나 혹은 게임 용도로 사용돼 왔다.

최근 의학분야에서도 정신질환 치료를 위해서 VR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VR 치료는 가상현실을 이용해 공포 유발 인자에 대해 환자를 단계적으로 노출시켜 점차 익숙해지게 함으로써 공황장애를 극복하도록 돕는 치료법이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구현해 이를 사람이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각종 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나, 공황장애 등 환자에게 허구 상황을 제시하고, 이를 극복하게 한다. 기존의 정신질환이나 공포증 치료는 주로 약물치료나, 인지행동 기법 치료가 주였다. 여기에 VR 기술을 적용해 환자가 공포를 직접 마주하고, 스스로 통제력을 향상시키도록 하는 치료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의사는 환자가 공포감을 느끼거나 심리적·신체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을 VR을 통해 재현하게 한다. 환자가 느끼는 반응을 의료진이 직접 확인하고 평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치료를 할 때도 환자가 가상환경을 통해 안전한 상태에서 공포에 노출되기 때문에 의료진은 환자가 이를 극복하도록 체계적 계획 하에서 치료를 진행할 수 있다. 단계별로 공포감을 느끼는 상황에 노출시켜 환자 스스로 이를 통제하고 극복하도록 지원한다. 조성진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VR 치료는 비행기만 타면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 지하철만 타면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공황장애 환자, 고소공포증 등 다양한 공포증을 이겨내도록 특정 상황에 지속 노출시켜 치료를 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공포감을 느끼는 정도나, 환자 상황에 따라 맞춤형으로 치료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VR 치료는 인체 생체신호인 뇌파, 맥박수 등 지표를 통해 치료 효과 여부를 측정한다. 예를 들어 환자 맥박수와 뇌파를 측정하고, VR 치료 전후 맥박수가 정상 범위인지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조성진 교수는 "공황장애 등 환자에게 VR을 적용하면 평소 회피한 장소나 상황 등에 익숙해지며 이를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서 "치료 성공률은 80~90%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임상적으로 유효성이 입증되고 있으며, 지금도 꾸준히 연구가 진행 중인 영역"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VR 효과는 임상적으로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고소공포증 질환도 극복 가능하다.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 다니엘 프리먼 교수 연구진이 국제 학술지 ‘랜싯 정신의학’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VR치료를 받은 연구 참가자 75% 이상에서 고소공포증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VR 클리닉센터가 지난 2017년 80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 결과, 공포 대상자 88%가 VR 치료법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했다.

조 교수는 "공포증은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더욱 공포가 커지거나 악화될 수 밖에 없다"면서 "가급적 공포를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피하지만 말고 이를 이겨내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강한 자극에 노출되면 안되며, 서서히 노출을 반복해 공포증을 극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VR 기술이 정신질환 치료에서 주목받는 것은 시공간 제약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환자에게 최적의 맞춤형 환경을 제공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다만 아직 갈 길은 멀다. VR 기반 인지행동치료는 다양한 질환에서 임상적으로 유효성이 있는지를 입증받기 위한 과정에 있다. 일부 병원에서 치료를 시행하고 있지만, 비급여 영역으로 분류돼 치료비 부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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