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신 마크롱이 외교 리더로… "佛語가 돌아왔다"

조선일보
입력 2019.09.12 03:00

미국·이란 핵 문제 풀기 위해 막후중재, 로하니와 여섯차례 통화
크림사태 이후 '왕따' 된 푸틴 초청… 러시아의 국제무대 복귀 돕기
외교 내팽개친 美·英·獨… 슈피겔 "마크롱이 자유진영 리더같아"

"프랑스어(語)가 다시 제1 외교 언어로 돌아왔다."

미국의 외교적 독선과 고립, 영국 브렉시트 혼란으로 서방이 분열되는 한편,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41) 정부가 각종 국제 분쟁의 중재역을 자임하며 외교 무대를 주도하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미 폴리티코와 러시아투데이(RT)는 최근 "트럼프 시대 외교는 다시 프랑스어로 이뤄진다" "프랑스어가 외교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공용어)가 됐다"고 전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어는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공식 외교 언어였다. 프랑스가 중세부터 절대왕정기에 걸쳐 유럽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되며 프랑스어가 각국 궁정에서 통용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부흥으로 미국 영어가 외교 공용어가 되기 전까진 제국주의 영국에서도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썼다. '아그레망(타국 외교사절 승인)' '코뮈니케(공동성명)' '데탕트(긴장 완화)'같은 외교 용어도 프랑스어다.

에마뉘엘 마크롱(가운데)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대통령 여름 별장인 남부 지중해 연안 브레강송 요새에서 아내 브리지트(왼쪽) 여사와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가운데)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대통령 여름 별장인 남부 지중해 연안 브레강송 요새에서 아내 브리지트(왼쪽) 여사와 함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이런 '프랑스 외교의 귀환'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최근 연이었다. 지난 9일(현지 시각) 프랑스의 외무·국방장관은 모스크바를 방문, 러시아의 외무·국방장관과 '2+2 회담'을 했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 사태 이후 서방과 러시아가 장관급 안보 회의를 연 것은 처음이다. 이 자리에선 유럽의 화약고가 된 크림반도 갈등, 미국과 이란 간 군사 긴장을 높인 이란 핵 문제, 나토 동맹과 러시아의 핵군축 등 굵직한 안보 현안을 논의했다고 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주요 7개국(G7) 회의 개최를 앞둔 지난달 말엔 블라디미르 푸틴(66) 러시아 대통령을 지중해의 여름별장으로 따로 초대했다. G8에서 쫓겨나 5년째 서방 제재를 받는 '왕따'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 배경에 대해 마크롱은 "우방의 적이 반드시 우리의 적은 아니다"라며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을 방치하는 것은 전략적 실수"라고 말했다. 적당한 양보를 받아내고 러시아를 국제 무대에 복귀시키자는 얘기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널드 트럼프(72) 미 대통령이 "러시아가 뭘 잘못해 G7에 안 부르냐" "오바마가 자기보다 똑똑한 푸틴을 쫓아낸 것"이라고 했을 땐 각국의 반감을 샀지만, 마크롱의 세련된 설명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를 다독인 마크롱의 당면 목표는 트럼프 정권이 깬 '이란 핵 합의'의 부활이다. 이란은 미국의 적성국들이 그렇듯 러시아와 보조를 맞추고 있어,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개선은 이란 문제의 큰 변수가 된다. 미국의 이란 제재와 군사적 긴장은 중동의 불안을 부채질해 유럽의 안보와 경제에 큰 위험 요인이 됐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크롱이 이란 핵 외교전의 주역으로 나섰다. 마크롱은 지난달 G7 회의장에 이란 외무장관을 비밀리에 초청해 주요국에 인사시켰다. 당시 미국은 면담을 거부했지만 "다음 기회를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실제 이달 말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하산 로하니(70) 이란 대통령 회담이라는 '빅 이벤트'가 추진 중이다. 이를 위해 물밑에서 프랑스 외교관들이 미국과 이란을 오가며 뛰었다고 한다.

마크롱 본인도 최근 로하니와 여섯 차례 이상 통화했으며, 대화가 두 시간씩 이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로하니 대통령은 1970년대 초대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와 함께 파리에 망명했던 인물로, 마크롱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건 다른 선진국들이 외교를 내팽개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유럽 동맹과 냉랭하고, 영국 보리스 존슨(55) 정권은 EU 탈퇴를 두고 내분에 휩싸여 바깥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65) 정권도 경제 침체와 극우 포퓰리즘에 휩쓸려 유럽 리더십을 포기한 상태다. 독일 슈피겔은 "가장 어린 마크롱이 자유 진영의 리더처럼 보인다"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의 외교적 야심이 미국의 힘을 대체할 순 없고, 마크롱의 도전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자국 정상의 외교 실력에 유독 관심이 많은 프랑스 국민의 특성상, 마크롱의 광폭 외교는 최소한 국내적으론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마크롱의 국내 지지율은 그의 공공부문 개혁안에 반발했던'노란 조끼' 시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으며, 특히 외교 분야 지지율은 75%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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