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美 실망의 무게' 모르는 靑

입력 2019.08.27 03:13

노석조 정치부 기자
노석조 정치부 기자
"우리는 한국 정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에 실망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22일 캐나다 방문 일정 중 세계 각국 외신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준비라도 한 듯 그는 망설임 없이 '실망'이란 단어를 썼다. 실망의 주체도 '나'가 아니라 '우리(we)', 즉 미 정부임을 분명히 했다.

한·미 외교·안보 전문가와 언론은 동맹인 한국에 대한 미 정부의 이 같은 입장 발표가 '이례적'이라며,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하지만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미 정부의 실망은) 당연한 것"이라며 별일 아닌 양 평가절하했다. 국무부의 실망을 그 정도로 취급해도 될까? 미국 정부가 그동안 '실망'이란 표현을 어떤 경우에 사용했는지를 살펴보면, 김 차장의 발언이 얼마나 경솔하고 사태 파악을 잘못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지난달 20일 폼페이오 장관은 터키 정부에 "실망했다"고 밝혔다. 터키가 미국의 거듭된 반대에도 '러시아판 사드'인 'S-400' 도입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터키에 "제재를 가하겠다"고도 했다.

미 국무부가 작년 4월 반미 독재국가인 쿠바의 부정한 권력 이양 과정을 비판할 때 쓴 표현도 '실망'이었다. 라울 카스트로가 그의 형 피델과 60년간 장기 집권한 데 이어 그의 측근에게 '관제 선거'로 권력을 승계하자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독재 정권의 유지 목적"이라며 내놓은 논평이었다. 국무부는 최근 민주 시위를 강경 진압한 홍콩 당국, 미국의 대이란 금융 제재를 우회하려는 일부 세력, 정부 비판 보도를 한 기자들을 구금한 미얀마 정부 등에 경고할 때도 "실망했다"고 했다. 요컨대 미국의 최우선 가치인 민주주의·자유·인권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국가 안보가 공격당한다고 판단할 때 이례적으로 사용하는 외교적 수사가 '실망'이다.

주권국인 대한민국이 미국의 실망이 두려워 미국의 뜻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지소미아에 담긴 안보적 함의를 얼마나 따져보고 파기 결정을 내렸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에 있어 지소미아는 반민주 독재정권인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서 동북아의 민주주의 맹방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데 필요한 '린치핀(핵심축)'이다. 우리에게 지소미아는 미국의 대(對)한반도 안보 공약을 작동시키는 한·미·일 안보 공조의 제도적 장치다. 미국이 '실망'한 것은 일본과의 감정싸움과 국내 정치적 셈법에 매몰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동북아 안보 구상에 어깃장을 놓고, 안보 자해 행위를 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70년 동맹인 미국이 내쉰 한숨에 담긴 무게를 지금이라도 이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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