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랍신, 태극마크 달고 바이애슬론 2관왕

조선일보
입력 2019.08.26 03:35

한국대표팀 사상 첫 금메달… 러시아 대표로 뛰다가 탈락, 평창올림픽때 한국서 받아줘
올림픽 이후도 러시아 복귀 안해… 불교신자로 한국 문화에도 익숙

파란 눈[碧眼]의 남자가 시상대 위에서 태극기를 바라봤다.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모국 러시아를 떠나 한국인이 된 지 2년 반, 티모페이 랍신(31)은 "한국이 내게 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랍신이 한국 바이애슬론 사상 최초로 국제바이애슬론연맹(IBU) 세계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그는 25일(이하 한국 시각)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열린 IBU 하계 세계선수권 남자 7.5㎞ 스프린트에서 20분48초로 결승선을 끊으며 우승했다. 랍신은 앞선 24일 수퍼 스프린트(5㎞)에서도 14분07초6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사상 첫 금메달에 이어 대회 2관왕까지 달성한 것. 지금까지 한국 선수의 바이애슬론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은 2016년 러시아 귀화 선수 안나 프롤리나(35)의 은메달이었다. 랍신은 26일 오전 남자 10㎞ 추적에서 대회 3관왕에 도전한다.

티모페이 랍신이 25일 IBU 하계 세계선수권 남자 7.5㎞ 스프린트(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우승하고 금메달을 깨무는 포즈를 취했다. 2017년 2월 러시아에서 귀화한 랍신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IBU 세계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티모페이 랍신이 25일 IBU 하계 세계선수권 남자 7.5㎞ 스프린트(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우승하고 금메달을 깨무는 포즈를 취했다. 2017년 2월 러시아에서 귀화한 랍신은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IBU 세계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국제바이애슬론연맹

하계 바이애슬론 세계선수권에선 눈 위 스키를 타는 동계 대회와 달리 '롤러 스키'를 신고 경기한다. 코스를 활주하다가 사격으로 점수를 얻는 방식은 같다. 하계 대회는 겨울 대회보다 규모는 다소 작지만, 세계적인 선수들이 새 시즌을 앞두고 경기력 점검을 위해 출전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경쟁이 만만치 않다.

러시아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인 랍신은 2016년까지 러시아 대표로 뛰다가 이듬해 2월 한국에 특별 귀화했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 전력 강화를 꾀하던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은 러시아에서 '파벌 문제'로 자리를 잃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2017년 5월 무릎 십자인대 수술을 받은 랍신은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지난해 평창 올림픽에서 스프린트 16위에 올랐다.

랍신은 올림픽을 마치고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고 한다. 부상 이후 제 실력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복귀에 급급해 운동량을 과하게 늘리다 보니 오히려 몸에 무리가 왔다.

특별귀화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선수 상당수가 올림픽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것과 달리 랍신은 대한민국 국적을 지켰다. 연맹 관계자는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받아준 한국에 고마운 마음이 큰 것 같다. 랍신이 현역 생활을 마칠 때까지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슬럼프와 숨 고르기를 겪은 랍신은 올해 벨라루스와 불가리아, 러시아 등을 돌며 맹훈련했다. 지난 5월엔 한 달 정도 국내(강원도 평창)에 머물며 체력 훈련을 소화했다. 불교 신자인 그는 틈틈이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등을 오르며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 이젠 족발이나 생선회, 김치 같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스며들었다.

랍신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성적이 나지 않으면 현역 생활을 접겠다'는 배수진을 쳤다고 한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자신감이 붙어 다가올 월드컵 시리즈에서도 좋은 결과가 예상된다. 당장 성과도 중요하지만 랍신은 좀 더 먼 목표도 바라본다. 그는 지난 2월 동계 체전 당시 "바이애슬론 선수는 30대 중·후반에 전성기를 누린다. 2022년, 그리고 2026년 올림픽까지 출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