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엔 점잖은 영국 신사, 왜 축구장만 가면 훌리건 되나

입력 2019.08.24 03:00

개인의 폭력적 성향 때문 아니라 군중에 휩쓸린 분위기가 유발
신학대 학생들 대상 실험에서도 길에 쓰러진 사람 도울지 말지는 인품 아닌 주변 상황이 결정

'사람일까 상황일까'
사람일까 상황일까|리처드 니스벳·리 로스 지음|김호 옮김|심심|608쪽|2만8000원

설교를 연습하기 위해 강의실에 가던 신학대 학생 존이 길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이 남자에게 다가가 도움을 줄까, 그냥 자기 가던 길을 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궁금해하는 것은 존의 인품이다. 그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다면 도울 것이요, 냉담한 레위인이라면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존은 지금 바쁜가, 여유 있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존의 인품보다 존이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존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다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전자를 성향주의, 후자를 상황주의라 명명한다. 이 책은 주로 상황주의에 입각해 인간 행동이 어떤 상황에 영향 받는지를 따져본다.

1991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사회심리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 책은 '인간 행동에서 상황(situation)이 지닌 위력은 성품의 힘을 능가한다'는 메시지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무엇인가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힌트를 받아 신학대생을 대상으로 무엇이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설교 연습 '시간에 늦은' 학생이 쓰러진 남자에게 도움을 준 비율은 10%에 불과한 반면, '시간 여유가 있는' 학생이 도운 비율은 63%에 달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생들을 선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한 건 각자의 성품이 아니라 여유 있는 시간이라는 상황임이 드러났다.

책에는 독자가 흥미를 느끼거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사례가 풍성하다. 영국 훌리건들은 평소 점잖고 신중하다가 왜 축구장에만 가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가. 그 사람 내부에 이미 폭력적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성향주의 설명은 배격당한다. 저자들이 택한 상황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사람들은 혼자라면 하지 않는 행동을 집단 속에서 버젓이 자행한다. 도시에서의 약탈과 폭동, 리오 카니발의 성적 문란함 등이 그런 사례다.

1970년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축구 경기가 끝난 뒤 흥분한 관중이 그라운드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고 있다.
1970년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축구 경기가 끝난 뒤 흥분한 관중이 그라운드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도덕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설파한 '악의 평범성'도 상황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이히만이 악마여서가 아니라 나치 하의 독일이라는 환경이 그를 악마가 되게 했다는 아렌트의 견해가 바로 상황주의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가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누군가 명백한 오답을 말해도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면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이들조차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답을 말해야 할지 망설인다. 관련 실험에서 적게는 50%, 많게는 80%의 실험 대상자가 너무도 뻔한 오류를 비판하지 않고 동조해 버렸다.

문화(culture)는 아주 강력한 상황 요소다. 결혼한 여성에게 돈벌이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여성이 자부심을 보일지 수치심을 드러낼지는 개인적 성향보다 그녀가 속한 사회 분위기에 좌우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선 수치가 되고, 양성평등 사회에선 자아실현이 된다. 문화는 수명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자란 미국 백인은 외로움, 불안, 실의 등을 홀로 처리해야 한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에서 자란 일본인은 주변의 지원을 받는다. 미국 백인은 일본인보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비율이 5배 이상 높은데 이는 문화가 주는 스트레스의 강도 차이 탓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불가항력의 힘을 갖고 우리의 삶을 좌우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성공한 의사·성직자·사업가·연예인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고, 우정을 쌓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읽을 신문과 책, 보지 않을 TV 프로그램까지 하나하나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들어갈 환경을 직접 조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환경을 탓하는 성향이 낮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은 삶이 힘든 이유를 불운, 즉 환경 탓으로 돌린다. 성공한 이들은 자식을 가르칠 때 책임감과 자기 통제를 요구하지만, 지위가 낮은 이들은 예절과 복종, 타인과의 인화, 훌륭한 매너를 강조한다. 사람은 상황의 힘에 휘둘리지만 그 상황을 만드는 이 또한 사람이란 생각을 곱씹으며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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