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때문에 뛰어난 선수가 못 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

'청각 장애' 테니스 선수 이덕희(21·서울시청·세계 랭킹 212위)가 2년 전 ATP(남자프로테니스) 투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경쟁자와 달리 홀로 '정적(靜寂)'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과 싸우는 그가 꿈을 향해 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듣지 못하는 건 단지 불편함이었을 뿐, 불가능은 아니었다. 이덕희가 20일 ATP(남자프로테니스) 투어 250시리즈 윈스턴세일럼 오픈 1라운드에서 승리했다. 청각 장애 선수론 처음 이룬 값진 결과다. 이덕희는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덕희는 20일(한국 시각) ATP 투어 250시리즈 윈스턴세일럼 오픈(미국 노스캐롤라이나·총상금 71만7995달러) 1라운드에서 스위스의 앙리 라크소넨(세계 120위)을 2대0(7-6 6-1)으로 물리치고 32강전에 진출했다. 이덕희는 ATP 투어 본선 5차례 도전 끝에 이번 대회에 출전했고, 그 첫 무대에서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이덕희는 21일 대회 3번 시드인 후베르트 후르카츠(세계 41위·폴란드)와 2라운드를 치른다.

청각 장애를 가진 선수가 ATP 투어 본선에서 이긴 건 1972년 투어 출범 이래 이덕희가 처음이다. ATP 투어는 공식 홈페이지 머리기사를 통해 "이덕희가 청각 장애 선수로는 새 길을 열었다"고 전했다. 미국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영국 BBC 등 유력 매체도 이덕희의 승리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세계 200위권 선수 소식을 속보로 다룬 건 이번 결과가 그만큼 의미 있기 때문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의 스포츠 대결에서 이기는 건 매우 어렵다. 이덕희는 경기 후 "ATP 투어 첫 승이 믿기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아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덕희가 20일 윈스턴세일럼 오픈 1라운드에서 자신의 ATP투어 첫 승리를 거둔 후 전광판 앞에서 기쁨을 드러냈다.

일곱 살 때 처음 라켓을 잡은 이덕희는 주니어 시절 각종 국내 대회를 휩쓸며 주목받았다. 정현(23), 권순우(22) 등과 함께 차세대 기대주로 성장하던 그는 2017년 세계 130위를 정점으로 다소 내리막을 걷었다.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단식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반등의 계기를 만들었다. 애초 올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 출전하려던 이덕희는 계획을 틀어 윈스턴세일럼 오픈에 출전했다. 그는 올해부터 윤용일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멘털 관리를 위해 3개월 전부터 테니스 국가대표 출신인 박성희 박사와 주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한다.

이덕희는 선천성 청각 장애 3급이다.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해도 잘 안 들리는 수준. 그는 수화(手話) 대신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구화(口話)로 소통한다. 말은 하지만 가족·친구처럼 친숙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경기에선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국 테니스 스타 앤디 머리는 20일 ATP 인터뷰에서 "만약 내가 헤드폰을 끼고 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공의 속도·스핀 등을 예측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며 "테니스 선수에게 청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덕희의 플레이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경기 중 심판과 의사소통이 잘 안 돼 어려움을 겪거나, 심판 콜을 듣지 못해 이덕희 혼자 경기를 이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덕희는 1라운드를 마친 후 '이중 통역'으로 인터뷰했다. 이덕희가 답을 하면 그의 약혼녀가 한국어로 또박또박 답하고 이를 대회 자원봉사자가 영어로 바꾸는 식이다. 인터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이덕희의 메시지는 뚜렷했다.

"듣지 못한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경기를 지켜봐 주세요,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