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 기자의 고색창연] 바빌론 유적지, '세계유산 등재' 36년 걸린 이유는?

조선일보
입력 2019.08.19 03:00

후세인 별장, 美 군사기지 등으로 시련 겪으며 훼손 심해졌기 때문
발굴 유적, 獨 박물관에 통째 복원

허윤희 기자의 고색창연
"바빌론 없는 세계유산 목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43차 총회에서 이라크 대표가 단상에 올랐다. 고대 도시 바빌론 유적지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놓고 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장(章)인 바빌론 없이 역사와 문화를 논할 수 있겠느냐"고 호소했고, 위원회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36년 도전 끝의 성공이었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심지에서 번성했던 고대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흥망을 거듭하며 세워 올린 문명의 상징이다. 화려한 채색 벽돌로 성과 문을 쌓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공중정원'과 바벨탑을 세웠다.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5㎞ 지점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라크 정부는 1983년부터 바빌론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해왔다. 왜 이제야 성사됐을까. 이라크의 굴곡진 현대사에 답이 있다.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상향으로 삼았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왕궁터에 별장을 지었다. 축구장 5개 규모 땅에 모래 벽돌 6000만개를 쌓고 "사담 후세인 시대에 바빌론의 영광이 재현됐다"고 써붙였다. 2003년 시작된 이라크 전쟁도 유적에 치명상을 입혔다. 미군은 바빌론을 군사기지로 삼고 헬기 이착륙장 등을 만들었다. 유네스코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곳곳에서 땅을 파헤치고 뒤엎는 방식으로 고대 유물이 훼손되고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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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신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Ishtar) 문'. 1900년대 초 독일인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적을 통째로 실어와 벽돌 조각을 일일이 붙여 복원했다. /허윤희 기자
바빌론 유적은 오히려 독일에 잘 남아 있다. 베를린 5개의 박물관이 모여 있는 '박물관 섬' 중 페르가몬 박물관에 신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Ishtar·사랑과 전쟁의 신) 문'이 있다. 1900년대 초 독일인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적을 통째로 실어와 복원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2011년 "바빌론에는 이슈타르 문과 비슷한 성문 수십 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온전한 것은 베를린의 푸른 문뿐"이라고 했다. 박물관 섬은 199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로부터 20년 뒤 바빌론 유적지는 등재에 성공했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과 파괴, 재건이라는 영욕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만한 세계유산이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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