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익어가는 마을… '발효 메카' 꿈도 영근다

입력 2019.08.16 03:01 | 수정 2019.09.20 16:56

[뜬 곳, 뜨는 곳] 바이오산업으로 뜨는 전북 순창

조선 제21대 왕 영조는 고추장을 즐겨 먹었다. 승정원일기에 영조의 고추장 사랑이 수차례 언급된다. 영조는 1749년 7월 24일 "옛날에 임금에게 수라를 올릴 때 반드시 짜고 매운 것을 올리는 것을 봤다"며 "그런데 지금 나도 매운 것과 고초장(苦椒醬·고추장의 옛 이름)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1751년 5월 18일 한 신하가 영조에게 "고추장은 근일에 연이어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영조는 "연이어 먹었다. 지난번에 처음 들어온 고추장은 매우 좋았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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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전북 순창군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서 관광객들이 장류(醬類)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장독대를 둘러보고 있다. 순창군은 고추장 마을 인근의 '발효소스 토굴'에서 장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도 진행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고추장 애호가 영조가 좋아한 고추장은 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사헌부 지평이었던 순창 조씨(淳昌 趙氏) 조종부의 집에서 만든 것이었다. 순창 고추장 제조법은 조선 후기 '소문사설'을 통해 전해진다. 콩과 쌀가루·고춧가루를 섞는 비율 등을 '순창고초장조법(淳昌苦草醬造法)'이란 단락에 자세히 소개했다. '전복 5개를 비스듬히 저미고, 대하와 홍합을 넣고 생강을 조각내 보름 동안 항아리에 넣어 삭히는 것이 순창 고추장의 특징'이라고 적었다.

전통 고추장 제조법은 현재까지 이어져 순창군의 주력 산업이 됐다. 지난해 순창군 장류(고추장·된장 등) 매출액은 3645억원에 달했다. 지난 2017년 국내 장류 수출액 4553만3000만원 중 1997만5000만원을  순창군에서 수출했다. 연간 수출량의 43%가 순창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관련 기업 88곳에서 845명이 일한다.

발효소스 토굴 전시장 내부 모습.
발효소스 토굴 전시장 내부 모습. 발효소스 토굴은 길이 134m, 폭 46m 규모로 연중 18도 정도로 기온이 유지된다. /김정엽 기자
최근 순창군은 수백년 발효 기술을 첨단화해 국내 바이오 산업 거점으로 뜨고 있다. 순창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이하 진흥원)이 관련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011년 3월에 설립된 진흥원은 미생물 관련 연구원 35명이 근무하고 있다. 진흥원은 150억원의 가치가 있는 미생물 자원 3만개를 확보해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진흥원에서 개발한 대표 상품은 미생물 발효 커피다. 발효 커피는 '루왁 커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 루왁 커피는 인도네시아에 서식하는 루왁(사향고양이) 똥에 섞인 커피 열매로 만든다. 사향고양이가 먹은 커피 열매는 소화 기관에서 나오는 미생물을 통해 발효된다. 진흥원은 지난 2016년 루왁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내는 고초균이란 미생물을 찾았다. 생두를 121도 고압 스팀으로 30분~1시간 정도 쪄 식힌 다음 고초균 등 미생물을 뿌려 발효해 원두를 만들었다. 진흥원은 이 원두를 약한 불, 보통 불, 센 불 등에 볶는 실험을 통해 루왁 커피와 비슷한 맛을 만들어냈다.

진흥원은 지난해부터 발효 커피 판매를 시작했다. 주문 생산으로만 1억원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순창군에 매장 2개를 만들었다. 지난 6월 말까지 3억7000만원의 발효 커피를 팔았다. 진흥원은 앞으로 발효 커피 프랜차이즈점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성 검토에 들어갔다. 김현영 순창 미생물산업사업소 연구원은 "발효 커피는 루왁 커피와 달리 동물 학대 논란에서 자유로운 천연 건강 커피"라고 말했다.

오는 2023년까지 예산 300억원을 투입해 장내 유용미생물은행도 만든다. 건강한 장내 미생물을 추출해 보관했다가, 나중에 이식받는 시스템이다. 태아의 혈액을 보관했다가 백혈병 치료에 쓰는 제대혈과 비슷한 개념이다. 사업 1단계로 2021년까지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8000㎡ 규모로 건물을 짓는다. 2022년부터 장내 유용미생물은행 시범 운영을 거쳐 202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장내 유용미생물은행이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7397억원의 생산 유발 효과, 2826억원의 소득 창출, 2531명의 고용 창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정도연 순창 발효미생물산업진흥원장은 "장내 미생물 샘플 50만개를 모아 국내 최대 규모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게 목표"이며 "사람의 장내 미생물뿐만 아니라 반려동물, 가축 등으로 샘플을 다양화해 관련 연구 기업에 판매하면 독보적인 수익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창군은 발효 자산을 한데 모으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16년부터 시작한 한국전통발효문화산업 투자 선도지구 조성사업으로 장류 산업 단지를 만들고 있다. 전체 사업비 1047억원을 들여 발효테마파크, 발효체험농장, 발효미생물전시관 등을 조성한다. 황숙주 순창군수는 "국내외 천문학적 규모의 미생물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을 구축해 순창의 100년 먹을거리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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