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스시 한 조각] [46] 이에야스의 인내심

조선일보
  •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입력 2019.08.16 03:11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急死) 이후 권력을 거머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세를 몰아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한다. 능수능란하게 세력을 불리며 서일본과 규슈를 접수한 히데요시는 1590년 봄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관동(關東)의 강자 호조(北條) 가문 복속에 나선다. 호조 가문은 본거지인 오다와라(小田原)성에서 농성(籠城)했으나 집요한 봉쇄를 견디지 못하고 그해 여름 성문을 열고 만다. 소위 '오다와라 정벌'이라고 하는 이때의 전투로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의 패자(覇者)가 된다.

관동을 접수한 히데요시는 같은 진영으로 참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도로 영지를 옮길 것을 넌지시 제안한다. 드넓은 관동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명분이었으나 내막은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에도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개척지였다. 반면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슨푸(駿府·시즈오카현)는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교통 요지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에도 전봉(轉封) 권유를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히데요시의 계책으로 해석한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울분을 토했지만 아직 히데요시에게 맞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에야스는 불온함을 내색하지 않고 명(命)에 따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수만 가솔을 이끌고 에도에 입성한 이에야스는 맨땅에서 다시 시작한다. 보통 영주라면 성(城)부터 챙길 것이나,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주거지 개척, 농경지 확보, 물자 운송용 수로 건설, 상업 진흥에 힘을 쏟는다. 다행히 에도는 동서를 연결하는 천혜의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에도 건설이 훗날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응징하고 강력한 통치력의 에도 막부를 여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에야스의 위대한 지도자 면모는 형세를 읽고 힘을 기르며 때를 고르는 안목에서 찾을 수 있다.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것은 분노나 오기(傲氣)가 아니라 냉철한 상황 판단과 전략적 인내임을 알려주는 교훈이 일본 근세 역사에 담겨 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