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이념의 외톨이

조선일보
입력 2019.08.16 03:17

북한의 도발에 한반도는 요동치지 않았지만,
국민들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요동치고 있다

최보식 선임기자
최보식 선임기자
3·1절 기념사처럼 '빨갱이' 단어를 다섯 번 사용하지 않았지만, 광복절 경축사에는 "이념에 사로잡힌 외톨이로 남지 않길 바란다"는 경고문이 들어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꼭 넣고 싶었던 구절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남북 경협으로 평화 경제가 실현된다면 단숨에 일본 따라잡을 수 있다"며 위기 처방전을 내놓았다가 스타일을 구겼기 때문이다. 세간의 첫 반응은 '가짜 뉴스려니'였다. 나중에는 대통령의 정신 건강을 의심했다. 더욱 운이 안 좋았던 것은 '평화 경제'의 파트너인 김정은까지 협조를 안 했다는 점이다. 그 발언이 있고 16시간도 안 돼 미사일을 또 쏘아대며 "남조선은 맞을 짓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광복절 경축 자리에서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데 무슨 평화 경제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북한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큰 성과다. 북한의 도발 한 번에 한반도가 요동치던 그 이전의 상황과 분명하게 달라졌다"며 직접 해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통령의 '자랑'처럼 그 이전 상황과 분명히 달라졌다. 헌법상 국가 보위 책무를 지는 대통령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최근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도 대통령이 안전보장회의 한 번 참석하지 않았고 침묵했다. 이에 보조를 맞춰 청와대 안보실장은 "미사일 도발이 큰 위협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 핵실험 횟수를 묻는 말에 난감해하다 안보실 차장의 틀린 조언을 받아 "한 차례도 없었다"고 답했다. 질의한 여당 의원이 "그렇지요. 한 번도 없었지요"라며 바보처럼 맞장구쳤다.

북한의 도발에 한반도가 요동치지 않았지만, 상당수 국민 마음속에서는 '나라가 허물어지고 있구나. 자유민주 체제가 이 나라에서 유지될까'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요동치고 있다. 어쩌면 북한의 미사일 한 발보다 이런 정부가 더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연설에서 "여전히 대결을 부추기는 세력이 국내외에 적지 않지만 우리 국민들의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입 닫고 있으면 대통령에게는 평화스러운 것이다. 심지어 '허튼 망발' '오지랖 넓다' '겁먹은 개'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 같은 공식적 막말을 들어도 "우리와 쓰는 언어가 다르다"며 굴욕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 생각하는 '평화'를 만들고 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지만, 바깥에서 대통령을 모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좀 참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 이는 우리 국민이 모욕당하는 것이다. 저 형편없는 북한 정권에만 당하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 대해 "그가 보낸 '아름다운' 친서를 받았다. 나도 한·미 연합 훈련 좋아하지 않는다. 북한 미사일은 미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니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지만, 문 대통령에 대해서는 "뉴욕 브루클린 임대 아파트에서 월세 114달러 13센트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방위비 인상)를 받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한다. 문 대통령의 억양을 흉내 내기도 했다. 트럼프의 인격 문제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문 대통령이 어떻게 비쳤기에 이럴까 싶다.

이는 대통령 개인에 국한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국격과 국민의 존중과 관계되는 것이다. 이제 중국은 "힘이 약하면 도망치거나 피해야 한다"고 조롱하고, 러시아 군용기는 우리 영공을 침범했다. 일본은 대놓고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국제 호구'처럼 된 것은 단순히 강대국에 끼인 약자(弱者)라는 걸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국민에게 자부심을 못 심어줄지언정 창피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대통령이 광복절 연설에서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교량 국가'가 돼야 한다"고 거창하게 말했다. 희망이야 밝힐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는 대통령의 말만 그럴듯할 뿐이다. 정말 '교량 국가' 같은 구상이 있었으면 일본 정부와 안 싸워도 될 싸움을 벌였을 리 없다. 당초 협상으로 해결하거나 서로 한 발씩 물러날 수 있는 사안을 '죽창가' 같은 관제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극단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 덕분에 대통령 지지율은 반등했지만, 결국 나라 경제와 기업, 서민들은 모두 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다.

대통령의 연설에서 "이념에 사로잡힌 외톨이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경고문이 바로 대통령 본인과 지금 같은 상황에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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