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우리 안의 파시즘

입력 2019.08.16 03:14

신동흔 문화부 차장
신동흔 문화부 차장
"아 유 재패니즈?" "노, 아임 프롬 코리아." "이프 유 아 재패니즈, 아일 세이 유 '퍼큐'."

2007년 취재차 방문한 중국 상하이에서 봉변을 당할 뻔했다. 센카쿠(댜오위다오) 갈등으로 발생한 반일(反日) 시위 여파 때문이었는지 평범한 젊은이가 낯선 외국인에게 개인적 린치를 가하려 한 것이었다. 일본 브랜드 음료수를 들고 다닌 게 잘못이었다. 적의로 차 있던 그 눈길을 잊을 수 없다.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중국인들이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곳은 사실 민족 문제밖에 없다. 사드 보복 기간에 보았듯 중국 정부는 자국민들이 주변국에 공격성을 드러내도 짐짓 내버려둔다. 상하이 반일 시위 당시 성난 군중이 일본어 간판을 부수고 가게 유리창을 깨도 공안들은 본체만체했다. 이런 것을 '관제(官製) 민족주의'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 보면 한국이 중국보다 나을 것도 없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완구 매장에서 딸이 사달라는 장난감을 보던 젊은 엄마가 "어머, 일본 거네. 안 되겠다" 하며 돌려세우는 것을 봤다. 중구청장은 거리에 '노 재팬' 깃발을 걸었다가 구설에 올랐다. 길에서 '어, 일본인이네?' 면박 주는 이들은 없었을까.

일본의 경제 보복은 생각할수록 치졸하고 괘씸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외교·경제 문제를 놓고 축구 한·일전처럼 '다시는 지지 않겠다' 결기를 다지고, 법무부 장관으로 내정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죽창가'까지 들먹일 일은 아니었다. '적폐 청산' 외치던 사람들은 '친일 청산' '매국노 단죄'를 외치며 역사의 시곗바늘을 과거로만 돌렸다. 그사이 일부 여권 사람들이 '선거운동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돌려본 사실도 드러났다.

민족 감정을 나쁘다고 탓하는 것은 아니다. 유발 하라리 같은 이도 TED 강연 '왜 파시즘은 유혹적인가'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것은 내셔널리즘 덕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배타성을 띨 때 위험해진다. 그 열기의 과잉이 테러와 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정권 핵심부 사람들은 일본을 무찔렀던 역사를 '자랑스러운 과거'로 소환하는 것 같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이순신 장군의 한시를 인용하며 각오를 다졌고, 대통령은 '거북선 횟집'에서 시·도지사들과 오찬을 가졌다. 일본을 무찌른 영광스러운 과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상징들이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는 구호를 들으면 '일제강점기에 향수까지 느끼나' 의문이 들 정도다. 파시즘 미학(美學)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판타지' 과거를 끊임없이 대비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불매운동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반일 목소리 높이지 않는다고 타인을 비난해도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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