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믿고 일자리 찾아 미국간 청년들…‘불법 원정 알바생’된 사연

입력 2019.08.13 14:52 | 수정 2019.08.13 17:34

정부 믿고 간 ‘웨스트 프로그램’…생활고에 불법 캐쉬잡
"인턴십 소식 없고, 체류·생활비 지원도 끊겨"
지원금 확대 필요한데…文정부서 예산 ‘2년째 동결’

A씨는 정부의 일자리 사업인 '웨스트(WEST) 프로그램'에 선발돼 최근 미국에 다녀왔다. ‘정부 지원받고 미국가자’라는 프로그램 슬로건을 믿고 현지에 갔지만, 세달 가까이 스폰서 업체로부터 "대기하라"는 답만 돌아왔다. 생활비가 바닥을 보이면서 직접 일자리를 찾아나서려고 했지만, "절대 개인이 일자리를 구하지 말라"던 사전 설명이 마음에 걸렸다. 자칫 비자 문제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상황까지 닥친 A씨. 결국 그는 현금으로 아르바이트 임금을 주는 ‘캐쉬잡(Cash job)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불법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길바닥에 나앉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웨스트(WEST)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년들이 사실상 ‘원정 불법 아르바이트생’이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정부가 생활비와 체류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해외에 나갔는데, 구직 대기 기간은 지원금이 끊기기 때문이다. 생활물가를 고려할 때 지원금만으로는 현지 생활이 불가능해 다른 일자리도 구해야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참가자는 비자 문제로 별도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어, 참가자들은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는 실정이다.

웨스트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어학연수와 인턴십, 여행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국립국제교류원 홈페이지 캡처
웨스트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어학연수와 인턴십, 여행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국립국제교류원 홈페이지 캡처
◇ 인기 WEST…美서 구직 대기기간 ‘사각지대’
Work(일), English(영어), Study(공부), Travel(여행)의 앞글자를 따 명명된 웨스트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청년들이 미국에서 단기 어학연수와 해외 인턴십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다. 특히 인턴 기간까지 마치면 한달 간 자유여행이 가능해 2008년 도입된 이후 매년 3대 1 내외의 경쟁률을 보일 만큼 인기가 높다. 올해 상반기까지 총 3700여명이 수료했다. 지난 8일까지 신청을 받은 하반기 웨스트 프로그램에는 총 423명이 지원해 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미국에 최장 18개월 동안 머물다 오는 장기 웨스트 프로그램의 경우 정부가 참가자 전원에게 항공료를 지급하고, 1000여 만원에 달하는 참가비 그리고 생활비를 소득분위에 따라 지원한다. 생활비는 소득 하위 3분위 이하에게 매달 88만~100여 만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이런 지원 대부분은 구직이 됐을 때만 지급된다. 현지 스폰서 업체에서 인턴 자리를 구해주지 않으면 그때부터 ‘대기’만 이어진다. 마음대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다. 스폰서 업체를 통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지는 비자는 ‘J-1’. 이 비자는 미국 국무부가 승인한 스폰서 업체를 통해서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돼있다. 결국 참가자 중 일부는 생활비 없이 대기하거나, 불법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길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웨스트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다녀온 B(25)씨는 "불법이기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분위기"라며 "대학생 신분인데 돈도 없고, 부모님께 마냥 기댈 수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국립국제교류원 측은 "지난해에 경우 평균 대기일수가 30일가량이었던 것은 맞는다"면서도 "올해는 열흘 이상 대기 기간을 줄였다"고 했다.

하지만 겨우 일자리가 잡혀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급 인턴직에 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웨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C(24)씨는 "인기가 많은 기업의 경우 무급인 경우가 많다"며 "인턴을 하더라도 정부의 지원금만으로는 현지 생활을 감당할 수 없어, 부모의 지원을 받거나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를 추가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신분 불투명, 방구하기도 어려워…文정부, 2년째 예산 동결
학생들의 정착도 문제였다. 신분 보장을 해주는 주체가 불분명해 집 구하기도 벅차다는 것이다. C씨는 "웨스트 프로그램 공식 증명서를 보여줘도 현지 집 주인들은 무급 인턴에다가 지원금도 변변치 않다보니 쉽게 방을 내주지 않아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며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약까지 맺은 프로그램인데, 별로 공신력은 없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국립국제교육원 측은 "참가자들에게 사전에 재정계획을 충실히 할 것을 조언했다"며 "정부 지원금이 참가자 전원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고, 비자 문제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다는 내용도 공지했다"고 했다.

하지만 유사한 문제는 매년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턱없는 지원금 때문에 웨스티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현지에서 캐쉬잡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원정 불법 알바’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비자 문제는 미국 국무부의 권한인 만큼 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 현실적으로 웨스트 프로그램 예산이 늘어나 지원금을 늘리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지만, 녹록치 않다. 웨스트 프로그램 예산은 2014년 57억원을 정점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현 정부 들어 2년째 동결돼 올해 45억원이 배정됐다.

국립국제교육원 관계자는 "생활 형편이 어려워 해외 유학을 기대하기 어려운 청년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고, 실제로 성공해 감사 인사를 전해오는 참가자도 있었다"며 "예산을 좀 더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다른 사업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 반영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