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것만 보는 '희망 安保'

조선일보
입력 2019.08.13 01:30

靑, 조롱 받고도 "北, 한미훈련 뒤 실무협상하겠다는 의지"
정세현 "北미사일 실험은 비핵화 전조, 군비감축 고려한 것"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지난달 25일부터 다섯 차례 계속된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의 미사일 도발과 대남 막말 및 조롱에 대해 어떤 언급이나 비판도 없었다. 북한이 지난달 25일부터 다섯 차례나 이스칸데르와 신형 전술 미사일, 신형 대구경 방사포를 발사했지만 19일째 침묵을 이어간 것이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도 열지 않았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이 나서 맞대응할 경우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며 계산된 저강도 대응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대북 대화 국면 회귀를 기대하며 북 위협을 의도적으로 축소·외면하는 '희망 안보관'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문 대통령이 침묵하는 사이 청와대와 정부·여당에서도 이날 "곧 북·미 대화가 시작될 것 같다"는 낙관적 목소리만 나왔다. 북한은 전날 외무성 국장 명의 담화문에서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 "겁먹은 개"라는 비방과 조롱을 퍼부었다. 하지만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한·미 연합 훈련이 끝나면 북·미 실무 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내정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발 더 나아가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비핵화의 전조이고 남북 재래식 전력 균형과 군비 감축을 고려한 것"이라고 북한을 일방적으로 두둔했다.

청와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훈련, 방위비 분담금과 관련해 쏟아내고 있는 부적절한 발언에도 계속 침묵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대선 자금 모금 행사에서 "뉴욕 브루클린 임대아파트에서 114.13달러를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받는 게 더 쉬웠다"고 말했다고 미국 언론이 11일 보도했다. 한·미 훈련에 대해선 "터무니없이 비싸다" "마음에 안 들었다"고 폄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 대통령도 정부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이 엄중한 안보 문제에서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희망적 사고'에 매몰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북한이 연일 신형 미사일 도발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이에 대항할 한·미 훈련과 동맹 체제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는데, 남북 대화와 평화 경제만 추진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일방적 기대감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노영민 비서실장을 보고 있다. 왼쪽부터 노 실장, 문 대통령,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면서 노영민 비서실장을 보고 있다. 왼쪽부터 노 실장, 문 대통령,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 /뉴시스

청와대의 침묵은 작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운전자론'으로 기세를 높일 때와 대조된다. 최근 한반도의 정세와 북한의 태도는 문 대통령을 '운전자'나 '중재자'에서 '제3자'로 내모는 형국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핵심 정책이 부작용을 낳을 때마다 '희망적 사고'를 피력해 왔다. 문 대통령은 작년 6월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 효과가 90%"라고 했고, 지난 5일에는 "남북 간 평화 경제가 실현된다면 일본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고 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통일부·국방부 등 외교·안보 부처에선 이날도 북한의 연쇄 미사일 도발과 막말에 대해 침묵하거나 두둔하는 목소리를 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공개 발언에서 북한 도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2일 브리핑에서 한국을 "겁먹은 개"에 비유한 북한 외무성 국장의 담화에 대해 "북쪽에서 내는 담화문은 통상 우리 정부가 내는 담화문과 결이 다르고, 쓰는 언어가 다르다"고 했다. "북한 담화에 국민이 모욕감을 느낀다"는 지적에 대해선 "결국 한·미 연합 훈련이 끝나면 북·미 간 실무 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에서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해 "우려와 유감"을 표명했지만 "한·미 군사 연합 훈련이 끝나면 재개될 북·미 실무 회담에서 긍정적 성과가 도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어 북한 도발에 대한 청와대의 침묵을 비판하는 야당에 대해 "안보 이슈를 정쟁으로 활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국방부도 저자세였다. 북한 외무성이 "정경두 같은 웃기는 것을 내세워 체면이라도 좀 세워 보려고 허튼 망발을 늘어놓는다"며 장관을 실명 비판한 것에 대해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느끼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통일부 이상민 대변인도 북한이 한·미 훈련에 대한 해명 등이 없으면 남북 간 접촉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남북 간의 접촉이나 소통에 관해서는 각급 채널을 통해서 유지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정부의 저자세는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한·미 연합 훈련에 북한이 반발하자 결국 훈련 이름에서 '동맹'이라는 표현을 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번 연합 훈련은 북한의 반발로 사실상 폐지된 과거 키리졸브, 독수리훈련 등과 달리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운용하는 가상훈련이다. 이렇게 한·미 훈련이 축소됐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터무니없이 비싸다"거나 "뉴욕 아파트 임대료 받는 것보다 한국에서 10억달러(방위비 분담금)를 받는 것이 더 쉽다"며 북한이 원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와 청와대는 미국에 유감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미 동맹과 대북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성한 전 외교부 차관은 "북한처럼 '우리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정부가 북한 비핵화, 북한 인권 증진 등 근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를 유지하는 '현상적 평화'만을 좇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는 이달 말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실무 협상이 재개되면 북한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돌아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정은의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하지 말라"는 비난에도 결국 6월 말 미·북 판문점 회동이 성사되고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6월 30일 미·북 판문점 회동에서 '한국 소외론'이 제기됐을 때도 개의치 않고, 이후 사실상의 '종전 선언'으로 평가했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며 "그러나 문 대통령이 직접 대응할 경우 김정은 위원장이 맞대응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의 계속되는 신형 미사일 개발로 안보 위협이 커진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현재 북한에서 실험하는 정도의 무기는 우리도 다 갖추고 있다"며 "현재 국방비 예산은 46조7000억원으로 정부 들어섰을 당시 국방 예산 40조3000억원에 비해 꽤 많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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